나는 산등성이 하나를 이웃해 두고있는 보물 제615호 석조여래입상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시멘트로 포장된 좁은 진입로에 주인을 알 수 없는 승용차가 길을 막고 있었다. 할 수없이 사적 제137호인 하점면 부근리의 고인돌로 향했다. 고인돌로 향하는 진입로에 은행나무 묘포가 자리 잡았고, 그리 넓지 않은 광장으로 차를 주차하기 편하다. 광장 입구에 도로가를 향해 '고구려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유적비'가 서있다. ‘강도의 맥’에서는 연개소문의 구기(舊基)를 하점면 부근리 사직골 서쪽산인 시루미산 정상으로 보고있다.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때 모든 실권은 대막리지 연개소문에게 있었다. 연개소문의 아버지가 고구려 최고관직인 대대로라는 직책에 있었고, 그것을 연개소문이 이어받을 때 많은 귀족이 반대했다. 대대로 직책의 연개소문은 당나라 침략에 대비해 천리장성 축조의 감독을 맡고 있었는데, 평양에서는 영류왕과 귀족들이 연개소문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것을 알아챈 요동의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살해하고, 왕의 조카인 보장을 허수아비왕으로 앉혔다. 한편 당태종 이세민은 돌궐을 굴복시키고, 고구려를 침공하나 안시성 전투에서 패하여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다. 하지만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세 아들간에 권력투쟁이 벌어져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은행나무 묘포 끝머리에 이르면 남한 최대의 북방식 고인돌의 거대한 모습이 시야를 압도한다. 굄돌이나 덮개돌은 강화도에서 많이나는 흑운모편마암으로 덮개돌의 길이가 6.5m, 너비가 5.2m, 두께 1.2m로서 전체높이는 2.6m이다. 이 거대한 청동기시대의 무덤은 강화지역의 기후와 토양이 일찍부터 인류가 살기에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고인돌은 그 형태상 3가지로 분류되는데 2개 또는 4개의 굄돌위에 평평한 덮개돌을 얹어 시신이 안치되는 돌방을 지상에 노출시키는 북방식과 낮은 몇개의 굄돌위에 둥그런 윗돌을 얹은 남방식 그리고 굄돌을 여러개 둘러 돌방을 만들고 덮개돌을 올려놓은 육지와는 다른 제주 고인돌이 있다. 한편 은행나무 묘포안에 거대한 굄돌 하나가 서있는데 그 크기가 사적 제137호인 고인돌의 굄돌과 비슷해 원래는 넓은 대지에 2개의 거대한 고인돌이 마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도대체 그 옛날 장정 500여명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무게가 50t이 넘는 덮개돌을 어떻게 얹었을까. 그 과정은 하나, 땅을 파고 적당한 크기의 굄돌을 구덩이에 세운다. 둘, 굄돌과 구덩이의 공간을 작은돌로 메꾸고 흙을 굄돌이 파묻힐만큼 낮은 언덕으로 덮는다. 셋, 언덕의 경사를 따라 덮개돌을 통나무를 이용하여 끌어 올린다. 넷, 덮개돌이 굄돌위에 중심을 잡고 놓이면 흙을 걷어낸다.
강화도는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우리 민족의 역사를 한곳에 집결시켜 놓은 작은 국토박물관이다. 강화고인돌 관람권에는 우리나라 거석문화의 상징인 고인돌중 제일 덩치가 큰 부근리고인돌이 전면에 실크스크린되었다. 고인돌 이벤트는 5일간의 원시체험으로 원시기원제, 원시생활체험 등이 꾸며졌고, 특별이벤트로 역사교실, 영화, 연극 등 그리고 관광이벤트로 역사기행과 갯벌탐험이 행해졌다.
답사 첫날, 강화읍 국화리의 청련사를 찾아가면서 떠올렸던 오련지(五蓮池) 전설 중 천축조사가 허공에 날린 연꽃중 흰꽃이 떨어진 자리에 세웠다는 백련사가 하점면 부근리 고려산 북록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아스팔트길을 올라가다 군부대 정문이 나오면 죄회전하여 시멘트로 포장된 산길을 구불구불 한참이나 올라
가야 백련사에 닿는다. 흙마당인 주차장에 마른가지를 하늘높이 솟구친 괴목 2그루가 가람의 연륜을 말해줄 뿐 백련사도 적석사, 청련사처럼 산문인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중 한 가지도 없어 곧장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근래 쌓은 높다란 석축으로 가람의 전각이 보이지 않았다. 가파른 층계를 올라서자 비좁은 마당에 키 큰 은행나무가 우람한 덩치로 답사객을 맞아 주었다. 백련사는 고려속대장경을 각판한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선비시인 석주 권필의 발자취가 머문 곳이기도 하다. 극락전에 보물 제994호로 지정된 단아한 철불아미타불좌상이 안치되었다. 적막해야 마땅할 산사에 때 아닌 금속성 전기톱질 소리가 요란했다. 소음을 피해 산길을 오르니 신축 중인 전각 옆에 부도밭이 자리 잡았다. 철책 앞에 한 인부가 팔베개를 하고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부도밭에서 서산대사의 6대손인 의해당 처활대사의 부도와 사리비가 눈길을 끌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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