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제 발길이 미치지 못한 하점면 장정리의 보물 제615호 석조여래입상으로 차를 몰았다. 오층석탑을 향하는 길을 따라가다 마을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석조여래입상으로 향하는 시멘트로 포장된 갈래길이 나온다. 오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은 봉천산 등성이 하나건너 자리잡고 있었다. 차창으로 봉천산 정상의 봉천대가 보였다. 해발 291m인 봉천산는 강화도 최북단에 위치하여 북녁산하가 강건너 마주 보인다. 등산로는 하점면사무소에서 출발해 정상인 봉천대에 올랐다가 오층석탑이나 석조여래입상으로 하산하면 된다. 편도 3.7km로 1시간 정도가 소요되어 한가족이 가볍게 등산하며 우리 민족의 분단 아픔을 가슴으로 체험할 수 있다. 봉천대는 높이 5.5m, 밑지름 7.2.m로서 정사각형의 사다리꼴로 돌을 쌓아올린 고려시대의 축리소였고, 조선시대에는 봉수대로 사용되었다. 한편 하음백 봉천우가 선조에 대한 은혜와 백성구휼의 덕을 기려 제를 올리는 봉천대를 짖고, 사찰을 지어 봉은사라 하였다한다. 하지만 봉천우는 고려 충숙왕 4년(1327)에 우부대언을 지낸 인물로 추정되어 시기가 100년뒤의 사람이어서 맞질 않는다.
봉수의 경로는 모두 5선이 있었는데, 종점은 서울의 목멱산(남산)이었다. 제1선은 함경도 경흥에서 강원도를 거쳐 양주 아차산으로 이어져 목멱산에 닿았다. 제2선은 경상도 동래에서 충청도를 지나 광주 천천령을 거쳐 목멱산에 신호가 도착했다. 제3선은 평안도 강계에서 황해도, 경기도 내륙을 통과해 고양의 염포나루를 거쳐 목멱산에 도착했다. 제4선은 평안도 의주에서 서해안을 지나는 해로봉수로서 경기도 모악서봉을 거쳐 목멱산에 이르렀다. 제5선은 전라도 순천에서 서해안을 거쳐 충남 내륙과 강화도 해안을 거쳐 목멱산에 닿았다.
다행히 석조여래입상을 오르는 좁은 산길은 콘크리트로 말끔하게 포장되어 있었고, 이른 시각인 지 인기척도 보이질 않았다. 석조여래입상은 낮으막한 돌담장으로 둘러쳐진 석상각안에 모셔져있다. 불상의 높이는 2.82m로서 두꺼운 판석에 낮은 돋을새김으로 조각했다. 여래를 감싸는 광배에 화염문을 새겨 조성연대가 11세기로 추정되는 이 석조여래입상은 입가에 보일듯말듯한 미소를 지어 자비롭게 보인다. 한편 석상각 처마에는 봉씨 시조를 모시게 된 내력이 적힌 전기가 걸려있어 여기를 찾은 답사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봉은사의 유적으로는 석조여래입상과 오층석탑이 남아있다. 전기에 의하면 하점면 부근리 안정곡에 있는 연못에서 봉씨의 시조가 출현했다. 그 5대손인 봉천우는 부원군에 봉해져 이곳에 5층석탑을 쌓고, 석상각안에 석조여래입상을 새겼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고려정권의 개경환도후 100년이 지나 폐허가 되어 찾는이 없는 절터를 봉씨의 후손인 봉천우가 한 가문의 원찰로 삼은 것으로 유추될 수 밖에 없다. 무성한 잡목의 잎사귀를 뚫고 들어온 햇살이 돌담장안의 잡초에 따뜻한 온기를 보듬게 했다. 나는 오층석탑을 답사하면서 아기자기한 유치원생들의 야외소풍 정경을 떠 올렸는데, 석상각을 감싼 돌담장은 한가족이 오손도손 모여 앉아 오후 햇살을 받으며 정담을 나누면 제격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드넓은 망월벌판을 내달려 내가면 구하리로 접어드는 샛길로 들어섰다. 추수를 기다리며 누렇게 익은 벼이삭이 고개숙인 황금벌판에 드문드문 조생종 벼를 베어낸 그루터기가 까까머리의 기계충 자국처럼 두드러져 보였다. 내가면 황청리에서 외포리 선착장까지의 해안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강화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길이다. 굽이굽이 고개길을 따라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폭좁은 해협을 두고 석모도가 마주 보인다. 이곳에 서면 바닷물도 강물처럼 세차게 흐른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해안도로가 시작되는 황청리 길머리에는 찻집 ‘시인의 마을’이 있어 웬종일 정태춘의 노래를 들려준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한번들러 전통차나 동동주에 파전을 곁들 이며 정태춘의 구수한 음성과 가락이 이곳의 황소 하품같은 풍광과 똑 맞아떨어지는 절묘함을 음미하는 것도 괜찮다. 활어횟집들이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포구에는 도회지 챠량들이 공터가 비좁게 늘어섰고, 쓸려가는 물살을 따라 사람들이 물가로 발걸음을 옮기며 망둥어 낚시에 여념이 없다. 길가 좌우의 횟집들과 강화유스호스텔을 지나쳐 고개마루에 오르면 해협을 내려다보는 향토유적 제23호 삼암돈대(三岩墩臺)를 만날수 있다.
삼암돈대는 강화도의 해안을 수비하고 감시소의 역할을 한 53개 돈대중의 하나로 조선 숙종5년(1676)에 축조됐다. 정포진 소관으로 해안절벽위에 자리잡았고, 돌이 많아 적선이 쉽게 배를 댈수 없었다고 한다. 돈대는 가로 22.5m, 세로 23m의 원형으로 포좌 4문, 치첩 55개소와 화약고 기지가 있었다. 외벽 높이 2 ~ 3m, 내벽은 1m 높이로 돌을 다듬어 축조했는데 북쪽으로 출입구가 나있다. 보수를 하면서 새로 끼워맞춘 화강석 흰빛깔의 낮설음을 축대위에 입힌 잔디가 감소시켜 주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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