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학교 강화학술조사단에 의해 선원사 터가 발굴되었는데 전돌, 막새기와, 범자가 새겨진 치미등이 출토되었다. 선원사는 강도시대의 최고국찰로서 당대의 국사, 고승들이 주지로 임명된 것으로 보아 선원사내에 대장도감이 설치되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선원사의 중심 사역은 남북으로 250m, 동서의 폭이 170m로 현재 발굴이 계속 진행중이었다. 발굴을 하느라고 나무를 베어내고, 침수피해를 막기위해 비닐을 덮어 폐사지의 황량함이 피부로 전해왔다. 선원사 터를 알리는 안내판은 설명 문구가 너무 빼곡해 답사객의 시선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제대로 된 석물하나 없는 터에 제단이 마련되었고 촛불이 켜 있다. 나는 살갖을 후벼파는 따가운 햇살을 피해 기념품가게로 발길을 옮겼다. 휴일이라 그런지 황량한 폐사지에 의외로 많은 여행객들이 몰려 북적거렸다. 자원봉사활동을 나온 학생들이 지난 폭우 피해를 입은 경내 생활용품들을 끌어내어, 흙찌꺼기를 물로 씻어내고 옮기느라 폭좁은 공간에 자리잡은 요사채 주변은 혼잡스러웠다. 그때 스님의 염불과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과거 영화에 대한 사무치는 정념일까. 중창불사에 대한 발복의 기원일까... 너른 폐사지에 쏟아져내리는 가을 햇살속으로 애틋하고 구성진 스님의 염불소리가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충렬사를 찾아가는 길에서 냉정리의 지명유래와 동냥고개의 전설을 애기했다. 그 철종외가(外家)가 지방문화재자료 제8호로서 냉정리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집은 철종 4년(1853)에 외숙인 염보길이 지었는데,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에 두는 H자형의 집이었으나 지금은 행랑채 일부가 헐려 ㄷ자 모형의 몸체만 남았다. 평면 구성이 경기지역 사대부집의 방식을 따랐지만, 건축법도에 맞게 웅장한 규모를 지양하고 고졸하게 지어진 것이 특색이다. 대문앞에 서면 턱밑은 채마밭인데 오른편 밭너머 소나무가 모여있는 얕으막한 구릉에 근래에 건립한 염제신 신도비가 보였다. 담장을 따라 은행나무와 소나무가 심겨졌고, 뜰 가운데는 열매가 붉은 잇몸같은 거대한 왕목련이 옛 시절의 영화를 반추한다. 역시 살림집은 사람의 온기를 맡아야만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사람이 떠나버린 지 오래인 철종외가는 퇴락한 기운이 역력했다.
백운거사 이규보의 묘는 전등사 방면의 301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다 길상면 길직리의 고개받이에서 오른편길가 오일뱅크앞 길을 따라 우회전하여 800m쯤 들어가면 다랑이논을 앞에 둔 산자락에 기대어있다. 묘소앞은 작은 공터로 차를 주차할 수 있다. 묘소 진입로 양옆은 벼이삭이 제무게를 못이기고 고개를 깊이 숙였는데 공터 가까이 진입로 왼쪽에 소나무 2그루가 누런 벼이삭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꽤 연륜들어 보이는 소나무는 지제부에서 두줄기로 갈라져 울창한 가지로 넓게 하늘을 가렸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청풍계’ 그림속의 소나무를 연상하게 되는데 가엾게도 논위로 휘어진 가지가 베어졌다.
이규보 묘는 봉분에 병풍석을 둘렀고, 별 특징없는 상석과 석등을 하나씩 봉분앞에 세우고, 좌우에 망주석 한쌍이 배열되었다. 향로석 앞에는 한쌍의 석양과 눈매가 매서운 석인상 한쌍이 묘소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이 고졸한 석물들은 당시의 기풍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이규보(1168 ~ 1241)는 고려 무신정권의 혼란기에 태어나 집현전 대학사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내 무신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문사였다. 이규보의 출생 전설로 그가 태어났을 때 온몸의 부스럼으로 사람구실을 기대할 수 없어 온 가족은 실망했다. 어느날 걸승이 유모에 업힌 아이를 보며 한마디했다. ‘장차 큰 인물이 될 아이를 왜 이렇게 내버려두는고’라고. 이규보의 저서로는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백운소설’등이 있다. 이규보가 문학의 독창성을 주장한 논리는 민족의식의 고양과 연결된다. ‘동명왕편’을 지으면서 그 서(序)에서 “천하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원래 성인의 고장임을 알게 하겠다‘고 하여 우리 민족의 기상을 고취시키고자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일대 서사시로 읊었다. 한편 이규보는 시월전(十月電)이라는 한시에서 몽고 침략에 대한 분노를 이렇게 나타냈다.
하늘이 교만한 녀석들을 풀어놓아 독이 이미 퍼졌는데,
이 겨울에 천둥 번개치는 것은 또 무슨 일인가?
번뜩이는 빛으로 오랑캐 머리를 향해 때린다면,
비록 때 아닌 때이지만 알맞은 때라 하겠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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