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江都를 가다

전등사 가는 길

대빈창 2012. 9. 3. 04:02

강화도에서 제일 큰 절 전등사는 길상면 온수리의 정족산에 자리 잡았다. 길상면은 정족산 남부에 있는 길상산(해발 336m)에서 유래했다. 길상산 정상에 예로부터 이름난 약천이 있어 여기에서 발원한 내를 길상계라 했다. 또한 길상산록에는 목장이 있었는데 사자발쑥으로 명마를 많이 생산했다고 한다. 한편 정족산 밑의 온수리(溫水里)라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 지명은 뜨거운 물과 관계있다. 정족산(鼎足山)의 鼎은 곧 물을 뜨겁게 덮히는 솥이니 자연히 온수(溫水)가 나올 수 밖에 없다.

전등사로 향하는 길은 두 군데로 동문이 정문이고, 남문은 에돌아 있다. 나는 답사 여정의 시간을 줄이려는 욕심에서 폭좁고 가파른 고개길 좌우로 음식집과 기념품가게가 즐비한 동문을 향해 엘셀레이터를 밟았다. 하지만 나는 곧 후회했다. 동문 성벽 왼쪽에 매표소가, 오른쪽에 간이주차장이 바짝 붙어 있었다. 전등사를 관람하려는 여행객의 다리품을 덜어주는 편암함이 있겠지만 성벽 밑뿌리에 붙어앉은 주차장으로 유서깊은 성벽 보존에 문제가 있었다. 나는 전남 해남의 대둔사 찾아가는 길을 떠올렸다. 벗나무, 동백, 참나무등이 울창한 터널을 이루어 소슬한 바람과 시원한 기운으로 답사객의 땀을 씻어주던 너부내계곡을 따라 난 10리길의 진입로. 그 길은 절 입구에 진을 치고있던 상가들을, 10리밖 산자락에 위락단지를 조성하면서 재정비해 가람을 찾는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사적 제130호인 삼랑성은 산의 형세가 세발달린 솥과 같다하여 이름붙인 해발 231m의 정족산의 석성으로 높이 2.3m ~ 5.3m로 성 주위는 약 2km이다. 『고려사』지리지 강화현 전등사조에 “삼랑성은 단군의 세 왕자인 부소, 부우, 부여가 쌓았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성은 막돌을 맞추어 쌓아 강화도가 고구려에 예속되기 이전 백제 초기의 석성으로 추정된다. 일면 정족산성인 삼랑성의 성역화 과정을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최완수는 이렇게 유추했다. 육지의 백성들이 몽고군의 발바굽아래 유린당하는데 강화도에 천도한 최씨정권은 강화도가 본래 민족의 성지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성역화 작업을 진행하는데, 그 대상으로 마리산과 삼랑성을 삼았다.

관람권 전면에 전등사 대웅보전 전경이 담겨 있었고, 후면은 전각에 대한 설명이 인쇄되었다. 작년 가을 답사때 시간에 쫒겨 나는 전등사 경내를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또한 휴일이라 가람은 관광객으로 넘쳐흘러 제대로 전각을 사진에 담을 수 없었다. 그 미진함을 달래기 위해 나는 전등사를 다시 찾았다. 나는 작년 답사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차를 도로변 무료주차장에 세워놓고, 가파른 계단을 타고 삼랑성 동문으로 올랐다. 웬걸! 성벽 턱밑에 나래비로 주차되었을 승용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의문은 예전 주차장터에 서있는 안내판이 풀어주었다. ‘삼랑성보수정비공사’.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보수공사후 성벽 턱밑 공터에 차들이 몰려들 때 주차장 개방 - 보수공사라는 악순환은 계속 될 것이다.

삼랑성 동문을 들어서 몇발짝 옮기면 지방기념물 제36호 양헌수 승전비가 비각안에 자리잡고 있다. 이 비는 조선 고종 3년(1866)에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프랑스 극동함대가 병인양요를 일으키자 당시 순무천총 양헌수(1816 ~ 1888) 장군이 정족산성에 강계포수 500여명을 매목시켰다. 프랑스 해군대령 올리비에 부대원 160명이 정족산성으로 쳐들어오자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섬멸시킨 공적을 기려 고종 10년(1873) 이곳에 승전비를 건립했다. 이 전투는 열악한 무기의 조선군이 신식무기로 무장한 프랑스군을 상대로 많은 무기를 노획하며 격퇴시킨 양헌수의 지략이 돋보이는 싸움이었다.

양헌수는 위정척사파의 태두 이항로의 제자로 헌종 4년(1848)에 무과에 급제했고, 그후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전임 판관의 탐학을 징벌하는 등 곧은 신념과 청빈한 삶으로 일생을 어려운 시대의 나라와 백성에게 받쳤다. 한편 정족산성 승전의 공로로 한성부좌윤에 특진되었고, 형조판서, 금위대장, 공조판서를 역임하며 1876년 강화도조약때 개국을 끝까지 반대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