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江都를 가다

세월먹은 밤나무가 충렬사를 좌우에서 옹위하다

대빈창 2012. 7. 13. 05:11

나는 내가면 외포리의 갈래길에서 양도방면으로 차를 몰았다. 인산저수지에서 양도면소재지 길을 버리고 불은면 삼성리의 농업기술센터를 지나 강화읍을 향한 직선로를 선택했다. 지방유형문화재 제21호로 선원 김상용선생을 주향으로 모신 충렬사(忠烈祠)를 찾기 위해서다. 선원면에는 냉정리라는 마을 행정명이 있다. 그 이름은 조선 제25대 철종이 강화도령시절 외가인 염씨댁에 얹혀살 때 마을처녀 봉이와 사랑을 속삭인 ‘찬우물’에서 연유한 것이다. 또한 고개이름은 동냥고개인데 빈한한 외숙 염씨가 강화도령을 걷어 먹이기 위해 넘어다녔던 고개라 전한다. 찬우물을 지나 선행리로 향하는 왼쪽길로 접어들어 고개마루에 오르자 충렬사가 멀찍이 보였다.

인조 19년(1641)에 현충사(顯忠祠)를 건립했는데, 효종 9년(1658)에 강화유수 허휘가 충렬사라는 사액을 받았다. 앞마당 왼편에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그늘을 짙게 드리웠고, 외삼문은 태극무늬가 뚜렷하다. 계단을 올라가 문을 밀치자 명륜당 공간은 텅 비어 잔디밭으로 변했고, 기와를 얹은 키낮은 담장 왼쪽 가까이 비각이 자리 잡았다. 수직방과 전사청이 좌우에서 마주보는 중앙통로를 따라가면 한단높게 내삼문이 있고 그안 정면에 한식목조 맞배지붕인 충렬사 편액을 단 사당이 있다. 세월먹은 밤나무가 사당 좌우에 옹립하고 뒤편으로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다. 지난여름 폭우로 비가 새었는 지 인부들이 기와갈이 작업을 하느라 지붕에 루핑을 씌웠다.

선현을 제사하고 성리학을 강론하는 두 기능을 결합한 최초의 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중종 38년(1543)에 세운 백운동서원으로 이황은 국가의 공인을 받는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는다. 한마디로 사족의 자율적 기구인 사립대학이 생긴 것이다. 선조대 사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지방에서는 서원을 중심으로 한 사족 지배체제가 확립된다. 이렇게되자 서원은 스승의 도학적 지위를 높이고, 후진을 양성하며 학통을 잇는 근거지가 되어 서원․ 사우의 남설이 이루어졌다. 날이 갈수록 서원의 문중성이 심화되고 세입, 국역부담자의 감소등 그 경제적 페단으로 국가 경제가 휘청거렸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1871년 문묘에 종사한 유현과 충절이 두드러진 인물로 1인1원의 원칙을 적용하여 전국의 600여곳의 서원을 헐고 47곳만 남긴다. 이곳 선원면의 충렬사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 제외된 곳이다.

남문에서 선원 김상용선생이 화약으로 자폭할 때 사람과 문루가 모두 날아가 그의 시신을 찾으려했으나 산산이 흩어져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남문에서 3km나 떨어진 선행리에 선원의 신발 한짝이 떨어져 이곳에 사당을 짖고 충렬사라 명명했다. 또한 충렬사의 비는 나라에 재난이 있을 때면 땀을 흘린다고 한다. 석주권필유허비와 마찬가지로 민중들은 애틋한 정을 이렇게나마 전설로서 입력시킨 것이다. 선원면의 이름은 고려시대 사찰 선원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선원(禪源)이었으나,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선원(仙源)으로 바꾼 것이다.

충렬사에서 시레미계곡을 따라 들어가다 채석장을 앞에두고 다리를 건너 좌회전하면 황련사 진입로다. 인도의 고승 천축조사가 절터를 물색하다 강화도에서 오련지를 발견하고 다섯색깔의 연꽂을 뿌려 그 떨어진 자리에 세웠다는 오련사중 나는 이번 여정에서 적석사, 청련사, 백련사를 들렀다. 검은 연꽃이 떨어진 흑련사는 혈구산 서쪽자락인 강화읍 남산리의 서영동 석굴(石窟)로 추정될 뿐 확실한 위치는 찾을 수 없다. 그러기에 이번 황련사 답사가 오련사중 마지막으로 나의 발길이 머무르게 된다. 하지만 본래의 황련사는 연화동 천경내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절은 화재로 소실된 후 지금터에 작은 암자 규모로 사세를 유지하고 있다. 절은 시레미 계곡 깊은 곳에 위치하여 그윽한 풍치로 수도처로 적합한데 현재는 비구니 도량이다. 애기단풍나무가 좌우로 늘어선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면 아직까지 밟아 온 오련사가 그렇듯이 일주문하나 없이 그대로 경내에 들어선다. ‘큰법당’이라는 편액을 단 전각에는 근래에 조성하였을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현과 문수보살을 앉혔다. 큰법당 왼쪽 공터는 석축으로 계단을 쌓아 정원을 만들었고, 갖가지 화초가 어울려 비구니의 세심한 손길을 느낄수있다. ‘천일관음기도도량’이라는 현수막을 이마에 멘 큰법당 오른쪽에는 태양열온수기를 머리에 인 요사채가 자리잡았다.

나는 황련사를 되돌아나와 충렬사를 지나쳐 선원면 지산리에 있는 사적 제259호로 지정된 선원사터로 향했다. 팔만대장경의 판각장소. 세계제국 몽고의 침략으로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했다. 국가 이데올로기가 불교인 고려는 외세의 침입을 부처의 원력을 빌려 막기위해 대장경 판각에 들어간다. ‘95년 경주의 석굴암, 서울의 종묘와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위원회에서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뽑힌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의 경판 종은 1,516종이고, 경판수는 모두 81,258매로 조선 태조 8년(1399) 합천 해인사로 옮겨졌다. 목판은 산벚나무, 돌배나무등으로 3년이상 바닷물에 담가 나무의 진을 빼고, 3년이상 그늘에 말려 부패를 방지했다. 팔만대장경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자, 탈자가 없으며 글씨가 정교하기로 이름높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