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를 되돌아 나오면서 나는 강화 고인돌축제에서 얻어들은 송해면 하도리의 비문을 생각했다. 하도리에 사는 한 아주머니로부터 나라에 변고가 일어나면 땀을 흘리는 염험한 비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 얘기에 나는 반사적으로 사명대사 표충비를 떠올렸다. 경술국치, 6.25 동족상쟁, 4.19혁명 등 역사의 소용돌이에 한됫박이나 땀을 흘린다는 신비한 비가 강화에도 있었다. 향토유적 제29호 ‘석주권필유허비’. 권필(1569 ~ 1612)은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강화도에서 유생을 가르치며 시를 읊었다. 그는 과거에 뜻이 없어 시를 지으며 가난한 삶을 살았다. 시류에 편승하길 거부한 강직한 시인으로 광해군4년(1612)에 척족들의 방종을 시로 풍자하여 귀양길에 올랐을때 친구들이 주는 술을 폭음하고 시인답게 절명했다. ‘한국문학통사3’에 임진왜란후 피난길에서 돌아와 서울의 황럄함을 읊은 ‘적퇴후입경(賊退後入京)’이라는 석주의 시가 실렸다.
옛동산에 가시 자라고 먼지 누렇게 덮였고,
돌아온 나그네를 그림자만 하나 따른다.
천리 산하에 전란의 피가 흐르고,
백년 성궐은 주춧돌만 황량하게 남았다.
남쪽 하늘 화각소리 언제 끝나며,
서쪽 변새의 임금 수레 어느날 돌아오리.
소나무 선 교외로 홀로 나가 옛길을 찾으니,
조각 구름 높은 가지에 슬픔이 서려있네.
석주권필유허비를 뒤로 하면서 나는 다음 목적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점면의 석조여래입상을 다시 찾기는 돌아온 길이 아쉬웠고, 불은과 길상 방면은 하루시간을 요하는 답사여정이었다. 거기다 강화읍과 선원면에도 나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곳이 부지기수였다. 그때 마을안 고샅에서 할머니 한분이 차를 세웠다. 할머니는 무엇이 그리 급했는 지 다짜고짜 차문을 열었다. 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목적지는 강화읍 중앙시장이었다. 나는 오늘 답사를 남문에서 마무리짖기로 했다. 강화읍 신문리에 자리잡고 있는 사적 제132호인 강화산성 남문은 시장통 뒷길 초입에 위치해 혼잡스러웠다. 조선 숙종37년(1711)에 건립된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2층누각 정면에 강화남문, 뒷면에 안파루(晏波樓)라는 현판이 걸렸다. 농협 앞 김상용순의비는 원래 이 자리에 있었다. 청군에게 항복하느니 죽음을 택해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한 선원 김상용의 절개. 무심한 담쟁이 덩굴만이 2층 난간을 기어올라 무성한 잎사귀를 홍예문까지 드리웠다. 윤기나는 담쟁이잎에 반사된 서녘 햇살이 화약불꽃처럼 보였다.
섬 구석구석에 널려있는 문화재와 기념물에 나의 발자취가 미치지 못한곳이 수두룩하다는 조급함에 아침 일찍부터 길을 나섰다. 어제까지 답사로 계획된 여정의 1/2를 소화한 것을 새삼 깨닫고 마음의 여유를 찾는다. 하지만 엑셀레이터의 얹힌 발에 힘이 들어갔다. 오늘은 북부 여정을 마무리짖고 남쪽으로 발길을 옮기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로 강화도 답사를 끝낸다는 것은 무리였고, 주말을 이용해 답사를 계속하여 이번 여정을 마무리짖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하점면 장정리의 석조여래입상을 염두에 두고 강화여고 안에 자리잡은 지방유형문화재 제34호 강화향교부터 찾았다. 그런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향교로 이곳과 교동향교가 있었다. 다행히 휴일이라 향교로 향하는 폭좁은 진입로에 인적이 뜸했다. 강화향교는 아마 건축물로서 가장 많이 이전을 다녔을 것이다. 고려 인종5년(1127) 내가면 고천리에 창건된 이후, 고려 고종 19년(1232) 강화읍 갑곶리로 이전되었다. 더군다나 고려 고종46년(1259)에 지금도 배시간으로 1시간20여분이 걸리는 서도면 볼음도로 옮겼다가 조선 인조 2년(1624)에 강화유수 심열이 송악산 기슭으로 옮겼다. 인조7년(1629)에 유수 이만열이 위패를 모시고 명륜당을 세워 비로소 체계를 갖추지만 강화향교의 수난은 계속 이어졌다. 현종 14년(1673)에 유수 민시중이 다시 남산골로 옮겼고, 영조 7년(1731) 유수 민척기에 의해 비로소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여러번 옮겨다닌 결과 강화향교는 엄정한 건물배치에서 다소 어긋났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들어가면 강화여고 건물이 길게 늘어섰고, 향교는 담벼락에 바짝 붙어 옹색한 모습이다. 더군다나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맞배지붕인 대성전은 정면에 외삼문을 세운 담장안에 홀로 서있고, 담장 왼쪽에 어이없게 민가가 자리잡았다.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인 명륜당은 민가 바로 앞에 어긋지게 자리잡았고, 그 앞 공터에 비문 2기가 서 있다. 정방형 화강석 대좌에 세워진 키작은 '유수 이공용희중수문묘 기적비' 앞에 가운데가 두동강난 하마비가 길게 누웠다. 옆 비문은 그런대로 귀부를 갖추었으나 거북의 머리가 떨어져나갔고, 각자는 마멸이 심하고 이끼가 잔뜩 끼어 판독이 쉽지 않았다. 보호철책 하나없이 떨어져나간 거북의 머리를 내려다보는 비문을 바라보면 처참하다 못해 씁쓸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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