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와 진경이입니다. 두 살 터울인 자매입니다. 민소매 분홍 줄무늬 원피스를 입고 V자를 그리는 언니 연수. 연노랑 T셔츠를 입고 언니 품에 안겨 환한 웃음을 짓는 동생 진경이. 보시다시피 의가 좋은 친자매입니다. 배경의 푸른 신록으로 보아 한창 여름입니다. 자매의 옷차림도 아주 시원해 보입니다. 분명 엄마가 셔터를 눌렀겠지요. 계사년인 2013년인 올해 동생 진경이가 중학에 들어갑니다. 자매는 이제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위 이미지는 언니가 5살, 동생 진경이는 3살 때 찍은 사진입니다. 새해를 맞아 제가 잊고 지낸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노트북을 엽니다. 제가 좋아하는 젊은 엄마의 바탕화면에 깔려있던 어린 자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담긴 이미지를 찾았습니다.
연수의 엄마와 아빠는 직장 동료입니다. 연수의 어릴 적 이름은 ‘진솔이’입니다. 저는 오래전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은 ‘진솔하다‘라고. 젊은 아빠는 첫딸의 이름을 대뜸 ’진솔‘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런저런 연유로 저는 진솔이를 아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진솔이를 더욱 사랑하게 된 것은 젊은 엄마의 한없는 자애 때문입니다. 진솔이가 태어난 해 겨울은 엄청 추웠습니다. 저는 분유통을 가슴에 앉고 진솔이네 집을 찾았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서 본 광경은 제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는 한참이나 찬바람을 맞으며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방안에 커다란 함지박이 놓였습니다. 젊은 엄마는 김이 설설 나는 가마솥의 데워진 물을 양동이에 퍼 담았습니다. 진솔이의 목욕물이었습니다. 그때 진솔이네 집은 아궁이에 나무를 때던 오래된 시골집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술을 좀 과하게 먹었습니다. 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에 진솔이 분유통을 들고 길을 나섰습니다. 며칠 뒤 젊은 엄마가 저에게 귀 뜀을 하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진솔이 할머니가 혀를 쯔 쯔 ! 차시며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저 양반은, 꼭두새벽부터 웬 분유통이고. 술 냄새는 그렇게 심하다냐. 니네 회사 사람 맞지.”
젊은 엄마가 사진을 부탁했습니다. 진솔이의 돌잔치 날입니다. 저는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필름 카메라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카메라에 필름을 쟁이는데도 애를 먹는 기계치였습니다. 카메라에 얽힌 말도 안 되는 에피소드 한 가지. 제 손에 넘겨진 카메라는 일제 ‘니콘 F-3'입니다. 그 시절 고급 카메라였습니다. 저는 찰칵! 소리가 나면 사진이 찍히는 줄 알았습니다. 한 달 내내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여름 현장사업을 마무리하고 보고 자료에 사진을 첨부하려 상사는 제게 카메라를 건네받았습니다. 요샛말로 상사는 완전 ’멘붕‘ 상태가 되었습니다. 카메라에 필름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저는 카메라를 챙겨 음식점으로 향했습니다. 그날따라 진솔이는 왜 그렇게 울어대는 지. 엄마 품에서 자란 진솔이가 많은 사람들을 보자 놀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사진관에 맡긴 진솔이 돌잔치 사진은 선명했습니다. 진솔이 돌잔치 앨범에 간직된 사진은 저의 작품입니다. 여기서 비밀을 밝혀야겠습니다. 그날 저는 카메라를 두 대 준비했습니다. 니콘 F-3와 포켓용 올림푸스 자동 카메라. 장면마다 두 대의 카메라 셔터를 번갈아 눌러댔습니다. 당연히 인화된 사진은 자동카메라에 담긴 필름 이었습니다. “진솔아! 이제 알겠지.”
진솔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 저는 진솔이의 가방을 사주고 싶었습니다. 김포 홈 플러스. 성질 급한 저의 재촉이 항상 문제입니다. 신학기 어린이를 위한 상품이 아직 매장에 입점되지 않았습니다. 미안함에 저는 진솔이의 손에 바비 인형 세트를 안겼습니다. 아! 그때 저를 멀뚱히 쳐다보는 진경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할 수 없죠. 가방 값의 두 배를 지불하느라 저의 지갑이 텅 비었습니다. 젊은 엄마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진솔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할머니의 의견을 쫒아 이름을 바꿨습니다. ‘연수’라고. 연수가 진경이의 손을 잡고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가게로 향하는 뒷모습을 본지가 8년이 다 되었습니다. 이제 두 자매가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어린 천사들은 어엿하게 숙녀 티가 날 것입니다. 녀석들이 저를 알아볼지 모르겠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집에 전화를 걸면 연수가 받습니다.
“연수 뭐하고 있었니.”
“공부하고 있었어요.”
엄마가 웃으면서 말합니다.
“우리 연수는 너무 고지식해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연수의 고지식이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고지식하다는 것은 원칙을 준수한다는 말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말아먹은 지금. 이 땅의 아이들은 지옥같은 무한경쟁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육이란 순번 정하는 줄서기에 다름 아닙니다. 낙오자에게는 '아동잔혹극'에 불과합니다. 영혼없는 사회의 교육 시스템에 아이들이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연수의 고지식은 원칙을 지키는 꿋꿋함으로 험난한 파도를 헤쳐 나갈 것으로 삼촌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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