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기러기 날아오르다...

대빈창 2013. 1. 17. 06:09

 

 

 

해짧은 겨울은 벌써 사방에 어둠의 커튼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올 겨울은 눈이 흔합니다. 겨울 들어 내내 쌓인 눈이 섬을 온통 하얗게 덮었습니다. 집 뒤 봉구산 자락을 따라가는 옛길입니다. 산자락의 경사는 밭이고 길 아래는 바다까지 다랑구지 논들이 이어집니다. 교교한 달빛아래 길가의 갈대들이 흰머리를 풀어 헤치고 키를 늘였습니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는 곳에서 날개 짓 소리가 점차 고조되더니 끼오륵 ~ ~ 꺄륵 ~ 요란한 울음소리가 밤하늘에 울립니다. 기러기들이 일제히 날개를 펴고 하늘로 떠올랐습니다. 하늘을 까맣게 뒤덮었던 기러기들이 어느새 V자 편대를 이루어 밤하늘을 가로 지릅니다. 녀석들의 안온한 휴식을 제가 방해 놓았습니다. 기러기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신경이 아주 예민합니다. 인기척이 느껴지면 몇 마리가 날개 짓을 펄럭이면서 비행 신호를 보냅니다. 그리고 저의 발걸음이 가까워지면 일제히 비상을 시작합니다. 녀석들의 체온으로 고구마 밭은 눈이 녹아 벌건 흙을 드러냈습니다.

바다의 물결이 높습니다. 파도소리가 들려옵니다. 길이 꺽이고, 저는 봉구산을 등 뒤로 하고 바다를 왼편에 둡니다. 그때 구슬픈 고라니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고추밭에서 검은 그림자 두 마리가 후다닥 산기슭으로 줄행랑을 놓습니다. 마른 고춧대 사이에서 단잠을 취하던 고라니들이 인기척에 놀란 것입니다. 새끼 고라니는 아마! 눈이 따가워서 울었는지 모릅니다. 낮에 먹을 것이 궁한 박새가 떼를 지어 마른 고추의 씨앗을 털었습니다. 꼬투리에 매달린 매운 씨앗이 새끼 고라니의 슬픈 눈망울에 떨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빈창 해변의 밤바다. 들물에 떠밀려온 백사장의 얼음 덩어리들을 밤 파도가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다랑구지 들녘을 가로지르는 농로를 타고 집으로 향합니다. 농로에 네다섯 개의 가로등이 불을 밝혔습니다. 기러기들이 야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가로등 불빛아래 논에서 알곡 섭취에 정신없던 녀석들이 저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과악 ~ 과악 ~ 울어대면서 제방 쪽으로 날아갔습니다. 언덕을 오르자 어머니가 마당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어머니 머리 위로 휘영청 보름달이 떠 있고, V자 편대를 이룬 기러기들이 밤하늘을 가로 질러 날아갔습니다.

기러기가 일찍 오는 해는 추위가 빨리 찾아오고 겨울이 길다고 합니다. 황금색 들녘에 콤바인이 등장하면 녀석들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하늘을 덮습니다. 하지만 녀석들은 착하게 논에 서있는 벼이삭에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콤바인이 지나간 논에 떨어진 낱알을 주워 먹습니다. 서도의 섬들은 기러기들에게 천국입니다. 볏짚은 가축의 조사료로 인기가 좋아 콤바인이 지나가면 바로 비닐포장을 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서해의 낙도는 운송료가 만만치 않아 수십년째 볏짚을 논으로 돌려주는 친환경농사를 지었습니다. 기러기들이 공짜로 낱알을 탐하는 것은 아닙니다. 녀석들은 먹이를 베풀어 준 은혜를 천연비료로 갚습니다. 바로 배설물입니다. 기러기들은 월동기간 내내 공동체 생활을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러기는 가족 사랑이 대단해 다친 가족을 위해 다 나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녀석도 있다고 합니다. 배울 점이 많은 녀석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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