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정월 대보름 - 달의 몰락

대빈창 2013. 2. 25. 06:43

 

 

 

오늘은 계사년 정월 대보름입니다. 서울의 달뜨는 시간이 4시 56분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카메라를 준비했습니다. 다행히 창문으로 보름달이 떠오르는 지점이 보였습니다. 대빈창 해변 하늘에 지는 해가 붉은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달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탁한 구름이 동녘 하늘에 잔뜩 드리웠습니다. 저녁을 먹고 몸에 밴 버릇대로 산책에 나섰습니다. 봉구산 자락의 비탈밭 길을 따라 대빈창 해변에 닿았습니다. 당연히 물때는 사리였습니다. 만조를 지나 바닷물은 모래사장에서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습니다. 다랑구지 들녘을 가로지르는 농로를 타고 언덕빼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느덧 어스름이 깔렸습니다. 달이 떠오른 지 두 시간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보름달이 구름에 가려 흐릿하게 모습을 간신히 드러냈습니다.

제 어릴적 집도 언덕빼기였습니다. 사자산 머리위에 멧방석만한 보름달이 떠올랐습니다. 텃밭 한가운데, 젊은 어머니가 어린 저를 뒤에서 껴안듯이 품었습니다. 제 손에는 불붙은 짚단이 들렸습니다. “다님, 다님. 우리 막내 올해도 잔병치레 없이 나기를 이렇게 다님께 비옵니다. 굽어 살피옵소서.” 불이 사그라들지 않은 짚단을 어린 제가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세 번을 이리저리 뛰어 넘었습니다. 그리고 굳은 가래떡을 짚불에 구워 형제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머리통이 커서는 이른 아침부터 귀밝이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다섯 가지 잡곡으로 밥을 한 오곡밥과 가을부터 어머니께서 갈무리해 둔 나물 반찬으로 배를 채운 나는 동네 끝집부터 어르신네들께 인사를 다녔습니다. 그날은 세집 이상의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가는 집마다 술을 대접받아 정오가 지나기도 전에 얼큰하게 술이 올라왔습니다. 또한 대보름날은 몸에 부스럼이 나지 말라고 호두와 밤, 땅콩 등 딱딱한 껍질의 과일을 깨물었습니다. 바로 부럼깨물기였습니다.

어릴 적 대보름날 놀이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마을 대항 불싸움이었습니다.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면 마을의 장정들과 아이들은 마을 앞 논배미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짚낟가리의 짚을 뽑아 쥐불을 놓고 며칠 전부터 준비한 불깡통을 돌렸습니다. 건너 마을 들녘앞도 훤해졌습니다. 어둠이 무르익고 누군가가 불깡통을 하늘로 던지면 횃불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느새 동네 형들의 손에 긴 장대가 들렸습니다. 형들은 들판 가운데서 고함을 지르며 서로 장대를 휘둘렀고, 꼬맹이들은 불붙은 짚단을 휘두르며 응원을 보냈습니다. 격렬한 싸움이지만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공동체의 해체는 가속도를 더했습니다. 그것은 개별 인간의 원자화에 다름 아닙니다. 부럼깨물기, 귀밝이술마시기, 오곡밥, 진채식 먹기, 달님께 소원 빌기, 쥐불놀이, 달집태우기, 횃불싸움 등. 아련한 어릴적 추억으로만 남았습니다. 덧창문을 열었습니다. 보름달이 완전히 구름 뒤로 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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