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정논 3

산책 B코스

나의 단순소박한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과는 식후 하루 세 번 산책이다. 아침․점심․저녁 날이 궂지 않으면 헌운동화를 발에 꿰찼다. 봉구산자락 옛길을 따라 출렁이다가 대빈창 들녘 들길을 따르다가 해변 솔숲을 지나 제방을 걸었다. 절벽 중간에 전망대가 서있는 바위벼랑이 반환점이다. 산책을 나서면 스물에 열아홉 발걸음이 옮겨지는 코스다. 이를테면 A코스다 나의 산책코스에서 숨겨진 B코스가 오늘의 이야기다. 섬 날씨는 바람이 세차다. 과장해서 몸이 크게 흔들리면 나는 B코스로 접어든다. 우리집 뒤울안 언덕을 시작으로 대빈창 해변 솔숲 산책코스는 빗살무늬토기 기형을 따라가는 형국이다. 뾰족한 토기 바닥의 작은 숲은 사거리다. 우측으로 꺾으면 해변으로 향하는 들길이고 직진하면 연못골 계단식 논이 나타났다. 좌측으..

입하立夏의 버드나무

버드나무는 천안삼거리의 능수버들이 가장 잘 알려졌다. 물가에 길게 늘어져 하늘거리는 수양버들은 아름다운 풍치로 유명했다. 우리나라의 버드나무는 40종류가 넘었다. 버드나무과 버드나무속에 속하는 활엽수였다. 갯버들 같은 관목과 버드나무나 왕버들 같은 교목도 있다. 백두산 꼭대기에서 자라는 콩버들은 바닥을 기어, 키가 한 뼘도 넘지 못했다.왕버들은 튼실하고 오래 살아서 정자나무로 남아 노거수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전남 장성의 수백 년 묵은 왕버들은 귀류鬼柳라고 불렸다. 비가 오는 밤이면 나무는 빛을 냈다. 이는 인P 성분이 내는 빛으로 사람들은 귀신불로 귀신나무라고 불렀다. 오래 묵은 나무답게 전설이 전해 내려왔다. 도둑이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 하지만 나무 밑에 버리지 않으면 밤새 도망쳐도 나무 밑을..

묵정논

들판 한가운데 / 몇 년 동안 묵은 논이 붐비기 시작했다 / 사람 손길이 끊기고 잡초 무성한 묵정논이 되었다고 모두들 혀를 찼는데 / 어느새 뭇 생명들의 피난처가 되어 있었다 / 온갖 농약의 융단폭격을 피해 숨어드는 / 들판의 유일한 방공호였다 / 일 년 내내 붐볐다 / 처음엔 작은 날벌레들이 잉잉거렸고 / 나중엔 너구리와 고라니가 뛰고 굴을 팠다 / 능수버들이 우거지고 / 백로와 왜가리가 둥지를 틀었다 / 으슥한 밤 은밀하게 꿈틀거리는 것들, / 교미하는 무자치 박새 물오리의 빛나는 몸과 젖은 눈을 훔쳐봤다 / 방공호에서 몸을 섞는 것들은 슬펐다 / 맹꽁이가 알을 슬고 꽃가루가 날렸다 / 장마 끝에 온갖 벌레와 곤충이 울었고 처음 보는 꽃들이 은하수처럼 무더기무더기로 흘러갔다 / 사라졌던 것들이 짝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