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순소박한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과는 식후 하루 세 번 산책이다. 아침․점심․저녁 날이 궂지 않으면 헌운동화를 발에 꿰찼다. 봉구산자락 옛길을 따라 출렁이다가 대빈창 들녘 들길을 따르다가 해변 솔숲을 지나 제방을 걸었다. 절벽 중간에 전망대가 서있는 바위벼랑이 반환점이다. 산책을 나서면 스물에 열아홉 발걸음이 옮겨지는 코스다. 이를테면 A코스다
나의 산책코스에서 숨겨진 B코스가 오늘의 이야기다. 섬 날씨는 바람이 세차다. 과장해서 몸이 크게 흔들리면 나는 B코스로 접어든다. 우리집 뒤울안 언덕을 시작으로 대빈창 해변 솔숲 산책코스는 빗살무늬토기 기형을 따라가는 형국이다. 뾰족한 토기 바닥의 작은 숲은 사거리다. 우측으로 꺾으면 해변으로 향하는 들길이고 직진하면 연못골 계단식 논이 나타났다. 좌측으로 틀면 봉구산 숲속으로 들어섰다.
제방은 여름에는 남동풍이, 겨울에는 북서풍이 등을 밀거나 얼굴을 할퀴었다. 백사장을 휩쓰는 바람이 얼굴에 모래를 끼얹어 따가웠다. 산책이 아니라 고역이었다. 특히 섬의 겨울바람은 살갗을 찢을 정도로 매섭다. 바람 세찬 날이면 나는 숲으로 들어가 B코스를 탔다. 잡목이 울창한 산속은 안전지대였다. 연못골 꼭대기는 허술한 하우스가 자리잡은 밭 필지였다. 농부 한 분이 겨울을 제외한 봄․여름․가을을 출퇴근하는 일터였다. 오르막을 올라서면 팔각정자가 나타났다. 숲속에 난 옛길을 따라가면 바닷가에 닿았다. A코스의 반환점 바위벼랑의 반대쪽 사면이다.
위 이미지는 뜬금없이 산중에서 홀로 녹슬어가는 경운기다. B코스에서 바다로 향하는 내리막길은 ‘고마이’ 계곡이다. 가난했던 시절, 쌀 한 톨 건지려고 외진 이곳까지 계단식 논으로 개간했다. 농사짓던 시절은 20여년 저쪽이었다. 계곡이 시작되는 지점에 한 필지의 논이 있고, 바로 아래가 둠벙이었다. 경운기는 둠벙의 물을 푸는 양수기용이었을 것이다. 바닷가까지 열 필지의 계단식 논이 펼쳐졌다. 둠벙은 여적 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묵정논들에 미루나무가 가득 들어차 습지 천이가 막바지 과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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