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근교 대학병원에 들렀다가 선창에 도착했다. 대리처방으로 어머니 파킨슨 약을 받아오는 길이었다. 섬은 주유소가 없었다. 동막해수욕장 가는 고갯길 정상의 주유소가 떠올랐다. 셀프 주유를 하고 다시 배터로 돌아오는 길, 돈대 이정표가 눈에 뜨였다. 시간은 넉넉했다. 바다가는 좁은 길로 들어섰다. 제방이 나타났다. 〈강화나들길〉 분기점이었다. 왼쪽으로 산을 오르면 20코스였고, 오른쪽 제방을 따라가면 7코스로 가는 길이었다.
배수갑문 옆 좁은 공터에 차를 주차했다. 북일곶北一串 돈대墩臺 600m라는 말뚝이 서있다. 시작부터 난코스였다. 코앞의 폐타이어 계단을 밧줄에 매달려 올랐다. 급경사를 오르자, 화살표가 그려진 1.07㎞라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직선거리는 600m, 산길은 1.07㎞로.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래 ‘사서 고생하자.’ 한낮의 온도는 30℃에 육박했고, 잡목 숲은 바람 한 점 없었다.
돈대가는 길은 가끔 나뭇잎 사이로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오르락내리락 꼬부랑길이었다. 산모기가 귓가를 맴돌며 끈질기게 쫓아왔다. 닭똥같은 땀방울을 연신 흘리며 나는 런닝바람으로 산을 탔다. 그리고 자책했다. 무모했다. 더군다나 슬리퍼라니. 해안초소가 보였고. 해병대원이 물 빠진 갯벌을 감시하고 있었다. 급경사 나무테크 계단 저편에 돈대가 보였다. 돈대에 오르자 바람길이 터졌다. 나의 몸은 많이 지쳐 있었다.
어머니는 걸신들린 것처럼 먹을 것을 탐했다. 파킨슨 복용약 부작용인 지 모르겠다. 하루 종일 입에 먹을거리가 당기신다고 하셨다. 뒷집 식구들은 주말마다 섬을 찾으면서 인사차 군것질을 들고 왔다. 떡, 치킨, 과자, 사탕, 케잌······. 나는 완곡하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어머니를 생각하시는 마음은 고맙지만, 몸이 불어 점점 걷기가 힘들어지셔서”
현미밥을 어머니는 하루 세끼 맛나게 드셨다. 나는 맥심커피도 감추었다. 내가 아침 식후 한잔 마시는 원두커피를 드렸다. 쓰다고 불평을 늘어놓으시면서 어머니는 머그컵으로 드셨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내가 살아야 얼마나 살겠느냐, 먹고 싶은 것 다 먹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 어머니의 식탐을 말릴 수가 없었다. 못할 짓이었다. 현미가 떨어지면 다시 흰밥을 해드려야겠다.
갈수록 걸음이 불편하신데도 어머니는 무엇이든 달게 잡수셨다. 어찌 해야 좋을까. 판단을 못 내리겠다. 며칠 전 아침, 눈을 뜨신 어머니가 다리 통증을 호소하셨다.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이 나왔다. 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당신은 속으로 자신을 얼마나 자책하셨을까. 마음이 급해졌다. 병원 예약을 했다. 다행히 빈자리가 있었다. 담당의사는 복용약의 용량을 올렸다. 반 년 만의 휠체어 외출이 고단하셨는지 어머니는 곤하게 주무셨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의 목소리가 밝아지셨다.
“막내야, 걸음이 옮겨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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