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이미지는 보름 전 저녁산책에서 만난 고라니이다. 곧게 뻗은 대빈창 해변 제방에 들어서 반환점 바위벼랑을 향해 걸었다. 고라니 한 마리가 나를 등진 채 제방과 산사면 사이 공터의 풀을 뜯으며 천천히 앞서 걸었다. 다행스럽게 귀가 어두운 녀석인지 눈치 채지 못했다. 바위벼랑 전망대를 오르는 나무계단이 보였다. 앞이 막히고, 그때서야 고라니는 뒤를 돌아보았다. 서향을 바라보는 해변의 일몰 한 시간 전 햇살은 강렬했다.
녀석은 눈이 부신 지 잠깐 멈칫했다. 『고라니는 쓸개가 없다』 다섯 번째 이미지를 얻었다. 고라니는 예의 날렵한 뜀박질로 아까시 숲으로 사라졌다. 서해의 작은 외딴섬마다 고라니 천국이다. 섬 농부들은 작물의 어린 순을 탐하는 녀석들로 인해 골머리를 썩였다. 고라니들은 언제부터 섬에 자리를 잡았을까. 황해黃海는 약 8천 년 전 빙하가 녹은 물이 밀려들면서 형성되었다. 빙하기 때 서해의 해수면은 현재보다 100m이상 낮은 중국대륙과 연결된 평탄지형이었다. 서해의 평균수심은 44m로 아주 얕은 바다다.
강화도에 딸린 서해의 섬들은 빙하기 때 평탄지형에 돌출된 산줄기였다. 삼산면의 미법도, 서검도와 서도의 말도, 볼음도, 아차도, 주문도 그리고 수많은 무인도들. 당연히 섬들로 이루어진 옹진군도 마찬가지였다. 빙하 녹은 물이 흘러들면서 계곡과 낮은 지역은 바닷물에 잠겼다. 물 위로 고개를 내민 봉우리와 능선은 섬으로 고립되었다. 고립된 섬마다 고라니가 생존했을 것이다.
‘생물 진화의 야외 실험장’ 갈라파고스 제도 일부는 화산활동으로 100만 년 전에 형성된 지질학적으로 젊은 나이였다. 1835년 9월 찰스 다윈이 목격한 고립된 섬의 세계는 그곳만의 생명들이 800만년에 걸쳐서 진화한 세계였다. 이구아나, 털물개, 자이언트 거북, 열대 펭귄, 핀치새······. 갈라파고스 제도내의 섬들은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특정 섬에 자생하는 특정한 종이 분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서해의 섬들은 갈라파고스 섬들보다 고립된 시간이 너무 짧았다.
고라니들이 새로운 종으로 분화되기에 부족한 시간이었다. 수시로 뭍에서 건너오는 녀석들과 유전적 교잡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고라니들은 물이 빠진 섬의 갯벌에 나왔다가 갯고랑처럼 좁은 바다를 헤엄쳐 건넜을 것이다. 놈들은 가까운 섬들을 징검다리삼아 뭍에서 외딴 섬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사람들 몰이꾼의 함성에 겁을 먹은 새끼를 밴 어미가 어쩔 수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작은 외딴 무인도는 고라니에게 신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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