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지은이 : 한창훈
펴낸곳 : 문학동네
‘일하다가 배고픕니다, 소주 마십니다. 외롭습니다, 소주 마십니다. 힘듭니다, 소주 마십니다. 일이 남았는데 잠 쏟아집니다, 소주 마십니다. 다칩니다, 소주로 씻어내고 소주 마십니다. 선장이 지랄합니다, 소주 마십니다. 선장 저도 마십니다. 동료와 시비 붙습니다, 소주 마시면서 화해합니다, 그러다 다시 싸우고 또 소주 마십니다. 여자 생각 간절합니다, 소주 마십니다. 고기가 잘 잡힙니다, 소주 마십니다. 고기가 안 잡힙니다, 소주 마십니다. 항구로 돌아옵니다, 소주 마십니다.’(108 ~ 109쪽)
책은 거문도 소설가 한창훈의 바다와 술에 대한, 아니 술을 마시는 사람과 삶에 대한 이야기로 여는 글과 닫는 글 그리고 10개의 챕터로 이루어졌다. 각시 없이 혼자 쓸쓸하게 사는 사내들의 외로움. 컨테이너 상선 콜롬보호를 타고 네덜란드 로테르담 항까지 1만 6천 킬로미터를 여행한 네 명의 작가( 한창훈·오수연·김해자·이원규). 일본 아오모리 아지가사와 바닷가의 허름한 술집 ‘다키와’에서 맛본 입안에 폭설이 내리는 술 ‘조빠리 사케’와 외줄낚시로 낚은 참치회. 성(性)에 눈 떠가는 유소년기의 주문도에 얽힌 추억. 싸구려 은색 목걸이의 술집 아가씨와 오징어 목걸이를 단 어릴 적 두 살 어린 옆집 계집애에 대한 회상. 고래고기·상괭이에 대한 추억. 쇄빙연구선 아라온호과 함께 한 북극해 탐사 등.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눈길을 오래도록 사로잡었다. 첫 번째 글 「죽음과 마주하여 소주 한 사발 - 팔경호 이야기」다. 팔경호는 거문도 주민들이 쌈짓돈을 모아 마련한 유일한 뭍과의 운송수단이었다. 1959년 추석을 며칠 앞두고 추석빔을 마련하기 위해 수산물을 싣고 떠난 배는 고흥 녹동항에서 일을 보고 초대형 태풍 사라호를 따돌리려 서둘러 거문도로 향했다. 북진하는 사라호를 피해 청산도 내항에 피양했지만 산더미같은 파도에 정박한 배들이 박살이 났다. 선장은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로 배를 몰고 나가며 되드리 삼학소주를 사발에 가득 부어 선원들과 마지막 건배를 했다. 섬주민들이 피땀모아 건조한 배를 태풍의 아가리에 밀어 넣을 수 없었다. 태풍이 한반도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물러났다. 5일이 지나도 팔경호는 소식이 없었다. 섬 주민들은 시신 없는 초상을 치렀다. 그때 거짓말처럼 팔경호가 수평선에 나타났다. 태산같은 파도를 맞으며 팔경호는 계속 태풍 정면으로 향했다. 옆으로 틀면 배가 좌초되기 때문이다. 대마도까지 뚫고 가자 태풍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죽음을 앞둔 한 바가지 막소주의 힘이었다.
여는 글에 컨테이너선 하이웨이호를 타고, 드넓은 인도양 한 가운데서 안동시인 안상학은 지구를 '허공에 떠 있는 푸른 물방울'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구절을 읽으며 무릎을 탁 쳤다. 『깊고 푸른 바다를 보았지』를 잘 참았지. 책은 박남준, 유용주, 안상학, 한창훈 공저로 바다여행 에세이다. 책씻이 하고나니, 하이웨이호 여행 글은 책 속에 없다. 책장에 세 권의 산문집이 어깨를 겯었다. 『한창훈의 향연』과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그리고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나는 바다와 섬의 작가 한창훈의 작품을 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단편소설 몇 편을 잡았을 뿐이다. 첫 산문집을 잡고 작가의 글맛에 깊게 빨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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