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지상에 숟가락 하나
지은이 : 현기영
펴낸곳 : 실천문학사
책의 1쇄는 20세기 마지막 해에 찍었다. 17년 만에 책을 잡다니. 나의 강박적 조급증이 장편소설에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손짓도 안 한 것이 분명하다. 나는 대학시절부터 작가의 마니아였다. 중단편소설모음집 『순이 삼촌』과 『아스팔트』 그리고 『마지막 테우리』. 세 권이 오래전부터 나의 손에 있었다. 지금 책장에 없다. 90년대 초반 안산에서 구로로 적을 옮기면서 안산노동자문학준비모임에 기증했다. 산문집 『바다와 술잔』이 유일하다. 나는 작가를 민족문학의 대표 작가를 넘어 한국 문단의 첫 손가락으로 꼽았다. 이 책은 가트에 수십 번 넣어다 물리기를 반복했다. 장편이 주는 지루함을 나는 못견뎌했다.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소설은 무려 134개의 소제목을 달았다.
‘나는 4·3의 민중수난을 고발한 글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 개처럼 시멘트 바닥을 기며 헐떡거리게’(172쪽) 만든 작품은 1978년 이 땅에서 최초로 제주 4·3항쟁을 활자화한 「순이 삼촌」이었다. 작가는 생지옥에서 살아나오며 이렇게 자신을 위안했다. “4·3은 살아있고, 현재진행형이고 나 역시 4·3의 피해자구나. 당시 피해자와 똑같이 나도 고문을 당하는 것이지.” 소설은 학살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정신적 외상으로 환청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하고 마는 친척 아저씨의 삶을 그렸다. 창작과비평 영인본을 통해 처음 만났다. 그동안 나의 가볍기 그지없는 역사의식에 몸서리쳤다. 나는 작가의 작품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소설은 작가가 고향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유년시절을 회상한 성장소설이었다. 작가가 어릴 적 하도 침을 흘려 돼지코를 부적처럼 목에 걸고 다녔다는 회상 장면을 읽으며 나는 어머니 방 수납장에 놓였던 작은 사진틀을 들고 왔다.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 나의 모습이 담긴 유일한 흑백사진이었다. 사진 중앙 너럭바위를 뒤로 하고 어린 내가 혼자 서 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김포 한들고개 언덕 초가집 마당 한켠이었다. 초여름이다. 바위 주변에 잡풀이 무성하고 뒤편 관목에 오이 넝쿨이 늘어졌다. 유달리 머리통이 큰 어린애가 카메라 정면을 응시했다. 잔뜩 긴장했는지 오른손은 어깨띠기 셔츠 아랫춤을 움켜쥐었다. 머리는 이부가리 정도로 짧다. 흰 고무신이 오른발에만 신겼고 왼발은 맨발이다. 한낮에 신발 한짝을 잊어버린 것일까. 눈에 띄는 것이 어깨띠기 앞섶을 흥건하게 적신 침을 흘린 자국이다. 나는 어릴 때 침을 많이 흘려 마을 어른들이 돼지 꼬랑지를 먹이라고 어머니께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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