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대빈창 2016. 12. 5. 07:00

 

 

책이름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지은이 : 박완서

펴낸곳 : 세계사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이나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데나 있었다.’(81쪽)

‘나는 마치 상처 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81 ~ 82쪽)

‘가끔 나는 손을 놓고 우리 시골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하염없이 생각하곤 했다.’(96쪽)

‘들판의 싱아도 여전히 지천이었지만 이미 쇠서 먹을 만하지는 않았다.’(102쪽)

 

어린 작가가 교육열 높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서울 유학을 왔다. 가난한 홀어머니는 문밖 달동네 현저동에서 바느질로 연명했지만 딸을 문안 명문 매동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어린 작가는 인왕산 자락 숲길을 혼자 걸어 통학하면서 고향 개풍 박적골의 흔한 싱아를 떠올렸다. 그렇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김포 들녘도 싱아가 아주 흔했다. 싱아의 표준어는 수영인데 산기슭의 볕드는 빈터에 무리지어 자랐다. 싱아의 어린대는 신맛이 강해 군것질이 귀하던 시절 꼬맹이들의 허기진 속을 달래 주었다. 흔하던 싱아가 이제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환경오염과 거리가 먼 작은 외딴 섬 주문도의 싱아는 봉구산 정상 철탑 빈터에 쫓겨 와 있었다. 입가에 침이 고이는 싱아를 떠올리며 나는 책을 펼쳤다.

작가는 1970년 불혹의 나이에 여성동아 장편소설 현상공모에 『나목裸木』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뒤늦게 나왔다. 2011년 타계하기까지 40여 년 간 80여 편의 단편과 15편의 장편소설 그리고 동화, 산문집, 콩트집을 펴냈다. 문단에 의하면 한국문학계의 거목 여성작가는 태작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도대체 나의 한국소설 읽기의 지독한 편식은 언제 어디서 붙은 것일까. 나의 손을 탄 여성작가의 작품은 손을 꼽을 정도였다. 작가의 작품도 『창작과비평 영인본』과 문학상 작품집에 실렸던 단편소설이 고작이었다. 1997년 학고재에서 세계문화예술기행1으로 펴낸 티베트·네팔 기행기 『모독冒瀆』이 책장에 유일했다.

초판본이 1992년 웅진출판에서 나온 장편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작가의 유년시절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엄마 손에 이끌려 처음 접한 서울 달동네의 문화적 충격, 일제강점기의 국민학교 생활의 호안덴 참배, 창씨개명에 얽힌 집안 다툼, 서울대 입학과 한국전쟁 발발 등.  소설은 끝을 보이며 한국전쟁 중 의용군으로 끌려갔던 오빠가 망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다. 오발사고로 다리에 관통상을 당한 오빠의 부상으로 피난을 포기하고 네 식구는 서울에 첫발을 디뎠던 달동네 현저동의 빈집에 몸을 맡겼다. 작가가 달동네에서 폐허가 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천지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확 끼쳤다.”(282쪽) 한길도 골목길도 집집마다 사람 그림자도 없는 무인지경의 서울거리를 내려다보며 작가는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에 사로 잡혔다. 작가의 자전소설 1책2권에서 나는 1권을 책씻이하고, 2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서둘러 손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