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허만하 시선집

대빈창 2016. 12. 19. 07:00

 

 

책이름 : 허만하 시 선집

지은이 : 허만하

펴낸곳 : 솔

 

새삼스럽게 나는 온라인 서적에 들어가 시인 고형렬의 생태산문집 『은빛 물고기』를 검색했다. 품절된 책을 운 좋게 몇 해 전 손에 넣었고, 급히 책씻이했다. 새로 장만한 책장에 꽂힌 책등이 보기 좋았다. 듣도 보도 못한 이름도 얄궂은 출판사에서 복간본이 최근에 나왔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최측의 농간』이라는 심오한 이름이. 대표는 젊은이답게 패기만만했다. “책이 절판되는 건 철저히 시장 논리 때문이에요. 돈이 안 되니까 더 이상 찍지 않죠.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는데 출판하지 않는 건 주최측(출판사)의 농간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출판사는 절판된 책을 복간하고 있었다. 나는 신생 출판사가 펴낸 몇 권 되지않는 책 목록을 살피다 산문집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라는 표제에 필이 꽂혔다. 저자는 시인이었다. 나는 시집부터 찾았으나 품절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큰 격이었다. 중고서적에서 찾은 시선집은 도서 배송료까지 시선집 원가의 두 배를 지불하고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허만하 시선집』은 초기 세 권의 시집에서 선한 시 모음집이지만, 무려 45년이라는 세월의 앙금이 가라앉았다. 첫 시집 『海藻』(삼애사, 1969년)에서 15편, 두 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솔, 1999년)에서 28편, 세 번째 시집 『물은 목마른 쪽으로 흐른다』(솔, 2002년)에서 46편, 그리고 시론 「詩에 관한 단상」이 묶였다. 시인은 1932년생이다. 1957년 문단에 등단했고, 첫 시집 상재 후 무려 30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내 놓았다.

 

‘물이 없는 땅에서 시퍼런 강을 만드는 것이 시의 권능이다.’(158쪽)

“다시 되풀이한다. 시는 물이 없는 땅에 강을 만드는 언어의 힘이다.‘(163쪽) 시론의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이다. 마지막은 ‘연곡사 동부도 앞에서’라는 부제를 단 「가릉빈가의 날개」(96쪽)의 2연이다. 우리 시단에서 드문 관념시를 쓰는 노시인의 시선집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시편이다.

 

지리산 자락 연곡사 뒤뜰에서 펼친 날개 접을 줄 모르는 새. 피아골 맑은 물에 비친 선홍색 단풍 비린 불길 미리 보았던 새. 밤나무 숲 가랑잎 지는 소리 울리는 이 골짝을 지키고 있는 맑은 노래. 터지도록 펼친 연화 꽃잎 위를 날고 있는 날개의 퍼덕임. 꿈의 실체는 섬진강 보드라운 잔모래 되어도 경두 논두렁길에서 처음 만났던 Kalavinka라는 낯익은 이름은 구름 한 포기 떠 있는 아함경(阿含經) 가을 하늘 높이를 날고 있다. 가을빈가. 가릉빈가. 땅에서 태어나는 인간의 소망 날개를 펼치고 있다. 가을 바람 일던 서라벌 절터 찾던 날 환하게 펄럭이던 당신의 옷고름처럼 아름다운 날개 인적 사라진 구례 골짝에서 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