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좁쌀 한 알

대빈창 2016. 12. 23. 04:33

 

책이름 : 좁쌀 한 알

지은이 : 최성현

펴낸곳 : 도솔

 

많은 사람들이 장일순을 찾아왔다. 찾아와 그들의 고민과 고통을 호소했다. 장일순은 그걸 그들과 함께 풀어야 했다.(239쪽)

 

가족 / 친구 / 시인 / 소설가 / 문학평론가 / 가수 / 화가 / 기공 지도자 / 사업가 / 인간문화재 / 장인 / 의협·신협·한살림 활동가 / 신부 / 목사 / 목수 / 교수 / 농민 / 제자 / 출판인 / 군인 / 도장 사범 / 가게 주인 / 사회운동가 / 정치가 / 드라마 작가 / 서예가 / 주교 / 교사 / 천주교 활동가 / 교회 실무자 / 국회의원 / 건설업자 / 장군 / 잡지사 기자 / 사회평론가 / 의사 / 소리꾼 / 사진작가 / 수녀

 

책은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선생을 곁에서 지켜 본 일화 140 꼭지와 선생이 직접 그리고 쓴 그림과 글씨를 엮었다. 시인 김지하의 스승.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이 한 눈에 반한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사람. 소설가 김성동과 가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긴 사람.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 이 시대의 단 한분의 선생님으로 모신 사람. 일본 사회평론가이자 기공지도자 쯔무라 다카시가 ‘걷는 동학’이라 칭송한 사람. 생명운동가 무위당(無爲堂) 장일순(1928 ~ 1994)은 ‘원주의 예수’로 불리며 원동 성당의 지학순 주교와 함께 유신독재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원주는 1970년대 반유신 투쟁의 성지, 민주화 운동의 고향이었다.

무위당은 말년에 호를 일속자(一粟子)로 바꾸었다. 그 이유를 어느 잡지사 기자가 묻자, 장일순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인간이라 누가 추어주면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어. 그럴 때 내 마음 지그시 눌러주는 화두 같은 거야. 세상에서 제일 하잘것없는 게 좁쌀 아닌가. ‘내가 조 한 알이다.’ 하면서 내 마음을 추스르는 거지.”(100 ~ 102쪽) 나는 그동안 선생과 관련된 책으로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녹색평론사, 1997년)와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시골생활, 2009년)을 잡았다. 그리고 뒤늦게 『좁쌀 한 알』(도솔, 2004년)과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삼인, 2003년)를 손에 넣었다. 천민자본주의의 지식인의 삶을 버리고, 가장 온유한 방식으로 산골에서 농사짓는 생태운동가 최성현이 쓰거나 옮긴 책들이 책장에 나란하다. 편집증적 강박증인지 모르겠다.

“여기가 장부들이 꿈을 펼치려고 세상에 나갔다가 그만 좌절을 하고 만 땅이 아닌가? 임경업이 여기서 났고, 신립이 여기서 죽었고, 또 근래에는 남로당의 김삼룡이 여기 사람이지?”(66쪽) 「좌절당한 사람의 땅」에서 무위당이 목사 이현주를 토닥이며 말이다. 목사 이현주는 충주 사람이다. 나는 이 말을 소설가 최용탁의 산문집 『아들아, 넌 어떻게 살래?』의 김성동의 표사에서 마주쳤다. 말끝에 이 구절이 덧붙었다. “최용탁이 충주 사람이지?”

미술평론가 유홍준은 「인위人爲가 아닌 무위無爲의 예술」에서 청나라 문인화가 정판교의 글을 인용해서 장일순의 창작 자세를 이렇게 얘기했다.

 

무릇 내가 난초를 그리고, 대나무를 그리고, 돌을 그리는 것은 천하의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함이지, 천하의 편안하고 형통한 사람들에게 바치고자 함이 아니다.

凡吾畵蘭畵竹畵石 用以慰天下之勞人 非以供天下之安亨人也(2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