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불온한 검은 피

대빈창 2017. 2. 13. 07:00

 

 

책이름 : 불온한 검은 피

지은이 : 허연

펴낸곳 : 민음사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헛수고에 지쳤을 때 그 고통의 악습과 매혹에 차라리 고개가 끄덕여질 때 시를 썼다.”

“패배한 공화국이었지만 묻어 버리고 싶었다.”

 

「자서」와 「개정판 자서」. 자서가 두 개인 시집은 1995년 세계사에서 첫 선을 보였고, 20년 만에 민음사에서 개정판이 나왔다. 나는 솔직히 시인을 몰랐다.  시집은 발문 「퀘이사(quasar)의 신탁(信託)」을 쓴 김경주로 대표되는 불온한 청춘(미래파 시인)들의 경전(?)이었다. 나는 신간 시집을 검색하다 세련된 장정과 눈길을 잡아끄는 표제 『불온한 검은 피』에 사로잡혔을 뿐이다. 시인은 첫 시집을 상재하고, 13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 연이어 4년마다 『내가 원하는 천사』(문학과지성사, 2012), 『오십 미터』(문학과지성사, 2016)를 펴냈다.

표제 『불온한 검은 피』는 3부의 마지막 시 「내 사랑은」(82쪽)의 마지막 연에서 따 왔다.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

 

마지막 시 「청량리 황혼」의 부제는 ‘CANVAS에 유채’다. 2부의 시편들에 철학자·화가·조각가가 등장했다. 에릭 사티, 프란시스 베이컨, GOGH, 권진규, 손상기, 오윤 등. 시인은 일간지 문화부 기자였다. 평론가 故 황병하는 시집을 이렇게 평했다. "누구와도 닮지 않았고, 그 어떤 유(類)도 아니며, 자기만의 공화국"을 가지고 있다고. 4부에 나뉘어 실린 62편의 시편들은 불확실하고 불합리하며 부조리한 세계와의 지독한 불화를 읊조렸다.

 

아무렇게나 쓰러지고 /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 그래도 아침이면 / 어느새 능청스러운 햇살이 / 방 한가운데 들어와 있기도 했습니다

 

「상계동」(20 ~ 21쪽)의 3연이다. 겉표지를 감싸 책장 구석에 시집의 자리를 마련했다. 90년대 초반 그 시절. 나는 상계동 신축 백화점 공사현장에서 두 달여 동지들과 막노동을 했다. 가난했던 우리가 대선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밤을 패 노가다를 하던 젊은 혈기는 정보요원의 사찰에 사색이 된 현장소장이 두 손을 내젓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 땅 주류 언론은 이렇게 떠들어댔다. ‘불온한 사상’의 오염이 극에 달했다고. 사상적 허기로 배를 움켜 잡았던 이 땅 청춘들의 혈관을 흐르는 피는 가차 없이 불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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