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먼 훗날 나는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맑은 진달래 한 송이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
『청구회 추억』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아름다운 산문은 선생이 1968년 7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의 사형수 시절에 쓴 글입니다. 하루 두 장 밖에 지급되지 않는 재생휴지에 한자 한자 적어 나가던 선생의 회한이 어땠을지 짐작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청구회 추억』을 세 번 만났습니다. 2008년 그림이 곁들여진 단행본은 손에 넣기가 저어되었습니다. 햇빛출판사의 초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빠졌던 글을 1998년 돌베개의 재간행된 책을 통해 읽었습니다. 아직 비닐포장을 뜯지 않은 『신영복의 엽서』에 영인본이 있습니다. 새로 나온 『처음처럼 - 신영복의 언약』의 부록으로 나온 실물 크기의 육필원고가 위 이미지입니다.
1966년 이른 봄 선생은 모교인 서울대학교 문학회의 초대로 회원 20명과 서오릉으로 소풍을 나섰습니다. 불광동 시내버스 종점에서 서오릉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거리였습니다. 길에서 선생의 눈길을 끈 이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여섯 명의 꼬마였습니다.
“이 길이 서오릉 가는 길이 틀림없지?”
선생은 이렇게 첫마디를 던졌습니다. 가난한 문화동 달동네에 사는 꼬마들도 벼르고 벼르던 봄소풍 길이었습니다. 석물(石物) 잔등에 꼬마들을 모두 태우고, 선생은 석물의 고삐를 잡은 폼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꼬마들은 헤어지면서 진달래꽃 한 묶음을 선생께 선물을 주었습니다. 보름 후 연구실로 꼬마들에게서 세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선생과 꼬마들은 매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6시 장충체육관 앞에서 만남을 가졌습니다. 약속은 선생이 1968년 7월 구속되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모임의 이름을 꼬마들이 다니던 학교 이름을 따 청구회(靑丘會)로 지었습니다. 꼬마들은 선생의 지도아래 독서와 골목청소(쓸기, 얼음 깨기, 진창 연탄재 덮기 등)와 남수약수터까지 마라톤으로 건강을 다졌습니다. 그때 선생은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에서 경제학을 강의했습니다. 선생이 담낭절개 수술로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했을 때 꼬마들은 두 번이나 면회를 왔지만 위병소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문화동에서 먼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선생은 첫만남 서오릉 소풍을 떠올리며 백운대 소풍을 이끌었습니다. 소풍 식구는 선생과 청구회 6명, 육사생도 6명, 청맥회(이화여대 세미나 서클) 8명이었습니다. 장충체육관 만남이 계속되면서 엽서·편지 왕래와 청구문고를 꾸렸습니다. ‘통일혁명당’ 사건을 조작하던 중앙정보부는 선생과 꼬마들의 모임인 청구회를 끌어들여 심문했습니다. 군법회의는 선생이 꼬마들을 위해 지은 ‘청구회 노래’가 잡지사 ‘청맥회’와 연결된다고 추궁했습니다. 군사독재 정권의 견강부회였습니다.
선생은 영어의 몸으로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장충체육관 앞에서 자신을 기다릴 아이들이 안타까웠습니다. 청구회의 추억은 선생이 여섯 꼬마들과 소박하고 순수한 만남을 이어간 2년여의 시간을 회상한 글입니다. 마룻바닥에 엎드려 재생휴지에 한자 한자 써내려간 가슴 애틋한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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