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이제 집에 다 와 가요.
서해 바닷길을 따라 내려 왔어요.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어요.
2017. 3. 31 주문도 ○ ○ ○
3월 마지막 날 진도 팽목항을 향해 엑셀을 밟았습니다. 김포에서 인천을 거쳐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 남으로 향했습니다. 3년 전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밤잠을 설치고 들뜬 마음으로 제주도 수학여행을 나섰던 길입니다. 세월호가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는 노선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섬을 출발한 지 8시간만에 진도 팽목항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3년 만에 올라 온 세월호가 망신창이 몸으로 반잠수함 ‘화이트마린’호에 실려 목포신항으로 이동하는 중이었습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목포 시내를 통과할 즈음 가로변은 온통 노란 현수막과 배너기의 물결로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목포신항이었습니다. 대로변마다 승용차들이 나래비를 섰습니다. 내처 진도 팽목항으로 향했습니다. 봄기운이 완연한 남쪽 섬의 작은 항구는 큰물이 지고 난 것처럼 쓸쓸했습니다.
2014년 4월 15일 오후 9시 악천후를 무릅쓰고 세월호가 인천에서 제주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탑승객은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을 포함해 승무원까지 모두 476명이었습니다. 4월 16일 오전 8시 49분 세월호는 전남 진도 앞바다 맹골수로에서 중심을 잃고 기울어져 표류했습니다. 10시 30분 침몰 전까지 172명이 구조되었지만 이후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습니다. 미수습자는 현재 9명 입니다. 2014년 11월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은 세월호 특조위를 조사권과 자료요청권만 있는 허수아비로 만들었습니다. 진상규명을 집요하게 방해하며 활동을 강제 종료시켰습니다.(DAUM 백과 - 세월호 - 발췌)
3년 전 그때 나는 일산 백병원의 입원환자였습니다. 세월호 참사 20여일이 지난 부처님 오신 날 주문도저수지 고갯길에서 자전거와 나동그라졌습니다. 수술을 받고 18일을 9층 입원실에서 보냈습니다. 병동 휴게실 TV는 24시간 뉴스 채널에 고정되었습니다. 링거주사를 손목에 매단 채 휠체어에 앉은 환자들. 환자를 둘러 싼 보호자와 간병인들. 그들은 세월호 뉴스에 온종일 눈과 귀를 모았습니다. 나는 입원생활 동안 9층 백병원 건물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잠들기가 두려운 나날이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과 분노를 짐작하기조차 어렵습니다.
팽목항 분향소. 꽃다운 나이에 억울하게 하늘나라로 떠난 넋들에게 한없이 미안했습니다. 영정 앞에 놓인 과자봉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손에 든 것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뜯지 않은 생수 한 통이 차 안에 놓여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목포신항에 엷은 안개가 드리웠습니다. 추모객들은 셔틀버스로 세월호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철책너머 멀리 반잠수함에 실린 상처투성이 세월호가 보였습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세월호 유가족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글을 이어가는 지금 침몰사고가 난 지 1,090일 만에 세월호가 뭍에 어렵게 올라섰습니다. 미수습자의 온전한 넋이 기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세월호가 조류 빠른 해협에서 왜 급선회를 했고 전복·침몰되었는지 모든 의혹이 규명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목포신항 철책 울타리에 노란 리본이 만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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