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지구영웅전설

대빈창 2009. 5. 4. 10:16

 

책이름 : 지구영웅전설

지은이 : 박민규

펴낸곳 : 문학동네

 

학교를 파하자마자 꼬맹이들은 족대를 들고 마을 앞 냇가를 향해 부지런을 떨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에야 놈들은 목표량을 달성했다. 밥알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바람벽에 걸린 괘종시계의 분침이 오늘따라 느리게만 돌아갔다. 기대감에 한껏 들뜬 놈들은 채 씻지도 못한 얼굴과 옷가지에 개흙이 묻은 채 대높은집으로 몰려갔다. 이마로 대못을 박는다는 김일의 프로레슬링 중계가 있는 저녁이었다. 시청료는 페인트 통 가득한 미꾸라지나 붕어였다. 천규덕의 당수, 장영일의 드롭킥, 여건부의 헤드락 등. 마을에서 유일하게 TV가 있었던 축대가 높았던 그 집 대청 앞마당에 멍석을 깔고 온 동네 남녀노소는 화면 속 프로레슬러들의 동작 하나하나마다 무슨 대단한 애국자인양 환호와 신음을 내질렀다. 나의 국민학교 시절 방과 후의 한 장면이다. 그 시절 TV 속 인물은 나에게 프로레슬러 아니면 사또 돌쇠같은 사극의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등 영웅들이다. 작가와 나와는 고작 6살 차이다. 세대차이인가. 아니다. 소설을 책씻이하고 나니 주변 환경의 차이였다. 즉 나는 시커먼 촌놈이었고, 작가는 도시물을 먹어 일찍부터 월간지 만화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작 나는 머리통이 커져서야 명절 특집으로 방영된 영화를 통해 이 소설의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구영웅전설'은 작가 박민규의 등단작으로 2003년 제8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바나나맨'을 보면서 나는 학창시절 읽었던 프란츠 카농의 '흰 가면 검은 얼굴'을 떠올렸다. 즉 바나나맨이라는 캐릭터는 외양은 황인종이지만,영혼은 백인종으로 경도된 이 땅의 미제국주의 숭배자들인 기득권자를 암시한다. 세계 자본주의 문화의 패권주의자 미국에 대한 인종적 열등의식을 이 소설은 역설적으로 경쾌한 입심을 통해 세상을 뒤집어 읽는다. 20쪽에서 슈퍼맨은 친구인 바나나맨에게 이렇게 말하다. "그럴거야. 황인종의 머리로는 풀기 힘든 문제지. 오, 미안 농담이야. 너의 본질이 희다는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걸. 그치?" 여기서 바나나맨인 이 땅의 기득권자들은 대부분 '미국원정출산' 주도자들로 그들의 자식은 이중국적자다. 그래서 그들에게 불안하고 후진 한국은 돈을 버는 곳일 뿐이다.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민중들에게는 소중한 땅과 장소가 그들에게는 한낮 투기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 돈벌이 수단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아주 나쁜 테러범들이다. 이것이 용산 참사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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