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백제시편
지은이 : 조재도
펴낸곳 : 실천문학사
2004년 5월 초판 찍고 펴냄. 세월 15여년을 기다렸다가 나의 손에 잡힌 시집이 새삼 고마웠다. 수상한 세월은 농업·농촌·농민을 노래한 신간 시집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쉽지 않았다. 할 수없이 나는 시선을 어깨 너머로 돌렸다. 『백제시편』. 4부에 나뉘어 59편이 실렸고, 해설은 문학평론가 방민호의 「백제 연작과 단형 서정시에 담긴 의미」가 얇은 시집의 마무리를 맡았다. 표제는 1부의 연작시 「백제시편」에서 따왔다.
성터 / 암문(暗門) / 반가사유상 / 공주박물관 / 왕비 어금니 / 시인 문무겸(당진, 1948 ~ 20001) / 예산 / 청양 구기자 / 남당리(부여) / 내산면 지티리(부여) / 부여 내산 / 청양 남양 / 칠갑산 / 천태산 / 목포 / 금강 / 장항 / 시인 이광웅(익산, 1940~1992, 오송회 사건) / 군산 / 이리 / 광덕산
시편을 읽어 나가다 눈에 밟힌 백제를 떠올리게 한 인물과 지역과 문화유산이다. “아득한 옛날 어느 즈음에 시작되어, 백제를 거쳐, 우리 어머니 아버지 대(代)를 거쳐, 그리고 나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온 그 ‘농경’이라는 생활문화 양식이 나의 대에서 끝나가고 있었습니다.”(117쪽) 시인의 말이다.
시인은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전두환 군사독재가 ‘민중교육’ 잡지를 좌경용공으로 매도, 관련 교사를 구속 파면한 사건)과 전교조 결성(1989년)으로 파면·해직되었다. 1994년 복직되었다. 이번 시집도 여지없이 민중적 세계관에 기초한 단아한 서정시가 주류를 이루었다. 시인에게 백제는 평등하고 화평한 사람들이 공동체적 삶의 원형을 이룬 이상향이었다. 마지막은 「한 세대가 간다」(34 ~ 35쪽)의 전문이다.
그분은
죽으면 생전 지게질에 어깨부터 썩는다는
농부였다
나도 그 어르신을 잘 안다, 그분은 내 친한 친구의 아버지였다
아랫목 방구들 싸아하니 식어지면
마른 장작 가져다 군불을 때고
고욤나무에 접붙여 가을을 열게 하던
그의 사투리 같은 삶이 마침표를 찍었다
집도 아닌
아들네도 아닌
낯선 도시 희디흰 중환자실 침대 위에서
최후의 눈꺼풀이 고단한 생을 덮었다
호박색 조등(弔燈)이 걸리고
나무즙을 빨아대던 매미 같은 자손들의
울음도 이만저만 수그러들고
치러야 할 일로 분주하기만 한 시간
나는 문득 처연해진다, 영안실 앞 문상객을 위한 천막 안에서
지게 작대기로 살아온 그분들의 삶
누천 년 이어온 흙빛 원시의 삶도 이제 그분이 마지막이고
사라져가는 그들 뒷모습을
그나마 추억하는 것도 우리 세대가 마지막일 거란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