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빈방의 빛

대빈창 2017. 10. 25. 07:00

 

 

책이름 : 빈방의 빛

지은이 : 마크 스트랜드

옮긴이 : 박상미

펴낸곳 : 한길사

 

책의 부제는 '시인이 말하는 호퍼'다. 시인 마크 스트랜드(Mark Strand, 1934 ~ 2014)는 평이하고 절제된 언어로 초현실적 이미지의 시를 썼다. 미국 최고 시인으로서 계관시인이다. 1999년 시집 『눈보라 한 조각』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열 권 이상의 시집을 펴낸 시인의 화가에 대한 두 번째 산문집이다. 책은 시인이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 ~ 1967)의 그림 30점에 대해 쓴 글이다. 32개의 챕터 중 그림설명 글이 27개, 호퍼그림 특성에 관한 글이 5개였다.

 

길모퉁이에 있는 밤새 여는 다이너의 불빛이 눈이 시릴 정도로 밝다. 세 사람이 앉아있다. 흰옷 입은 종업원은 한 사람을 올려다본다. 여자는 딴 생각에 잠겨있다. 옆 남자는 종업원을 보고 있다. 등을 보이는 남자는 남녀 쪽을 향해 앉았다.(『나이트호크』, 1942년)

길 건너 2층짜리 건물은 캔버스의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차지했다. 건물 위 파란 하늘은 한 줄 뻗어나가다가 짙은 사각형 건물에 막혔다. 거리는 텅 비었다. 인도와 차도를 가르는 연석이 수평으로 길게 뻗었다. 1층과 2층을 나누는 지붕선 또한 수평으로 길게 뻗었다. 이른 일요일 아침이다.(『이른 일요일 아침』, 1930년)

흐트러진 침대 옆, 바닥에 깔린 햇빛 위에 한 여자가 나체로 담배를 들고 서 있다. 여자는 생각에 잠겨있다. 여자는 다리를 약간 벌린 채 햇볕의 따스함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기분좋은 바람에 몸을 맡기고 서있다.(『햇볕 속의 여자』, 1961년)

통 유리창 앞 원탁에 여자 혼자 앉아있다. 탁자는 문 가까이 있다. 여자는 생각에 잠겨있다. 장갑을 낀 한 손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장갑을 끼지 않은 다른 손으로 커피잔을 들고 있다.(『휴게실』, 1927년)

 

책에 실린 30점의 도판 중 내 눈에 익은 호퍼의 그림 4점이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은 『나이트호크』를 보며 현대 도시의 핵분열적 고립과 소외의 극한을 보여 주었다고 평했다. 냉전시대 미국을 휩쓴 미술사조는 잭슨 폴록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였다. 추상미술을 하지 않으면 범죄자 취급을 당하던 시대 호퍼는 고집스럽게 구상미술의 맥을 이었다. 독특한 빛 처리, 짧고 고립된 찰나의 표현, 텅 빈 공간을 감각적으로 재현하여 오늘날 미국 대중문화의 영원한 오마주가 되었다. 미국 현대 미술작가 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표지그림 『빈방의 빛』은 1963년에 그려진 호퍼의 마지막 걸작이었다. 창을 통해 들어 온 빛이 같은 방에 두 번 떨어졌다. 한 번은 창과 가까운 벽에, 또 한 번은 조금 들어간 벽에. 마지막은 옮긴이가 『빈방의 빛』과 가장 닮은 시로 뽑은 시인의 「그대로 두기 위하여」 전문이다.

 

초원에서 / 나는 초원의 부재다. / 언제나 이런 식이다. / 어디를 가건 / 나는 무언가의 사라짐이다.

내가 걸을 때는 / 공기를 갈라놓는다. / 그리고 그럴 때마다 / 공기가 움직인다. / 내 몸이 지나간 자리를 / 메우기 위해

사람들이 움직이는 데는 / 저마다 이유가 있다. / 나는 무언가를 그대로 두기 위해 /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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