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물의 정거장
지은이 : 장석남
펴낸곳 : 난다
장엄한 수덕사 저녁예불과 도배작업하며 재즈 듣기를 꿈꾸고. 기사식당 주방의 허리가 잔뜩 굽은 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심정. 인사동 고산 서실古山 書室 주인 김정호 선생님의 백난청분白蘭淸芬 전시회에서 본 노근란露根蘭. 빈집에 만발한 작약과 방벽에 걸린 국화꽃 한 다발. 낙산사 의상대의 새벽 바다와 주유소 사은품 봉숭아씨앗 한 봉지. 컴퓨터 화면 앞 돌멩이와 우유컵보다 조금 큰 장미 화분. 땔감 나뭇통을 인 어둑어둑한 비탈길의 어머니와 바다가 바라보이는 집. 인천 도화동 오동나무집과 최초 구입한 오디오 세트의 첫곡 쳇 베이커. 마른 파가 바람결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아이들 이부자리를 아파트 옥상에서 햇볕 말리기. 베란다 바깥 국기게양대에 매단 풍경. 새해 첫 여행으로 강원도 골짜기와 바다에 닿는 여로. 강남고속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바다와 인접한 여인숙에서 묵음. 유곽 앞 오동나무 한 그루와 마당에서 세숫대 아침 세수. 외딴 산골 작은 양철지붕집의 대나무를 쪼개 엮은 발을 늘인 곁방. 겨울 북한산 기슭 한적한 암자 풍경소리.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었고 63편이 실렸다. 시인의 첫 산문집으로 출판사 〈이레〉에서 2000년에 첫 모습을 보였다. 새로 쓴 산문들을 1부에 덧댄 개정판이었다. 출판사 〈난다〉에서 시인의 산문집 두 권이 나란히 나왔다. 시 감상 글을 엮은 책 『시의 정거장』과 개정판 『물의 정거장』이다. 요즘 눈에 띄는 책들이 시에 짧은 감상문을 곁들인 ‘시 해설서’였다. 나의 관심은 그런 류의 책에 벌써 시들해졌다. 어느 해 부처님 오신 날, 시인은 대웅전에서 연꽃을 만드는 수녀님을 보았다. 수녀님의 쌍둥이 동생이 그 절의 비구니였다. “둘 사이엔 아무런 담이 없음을, 거리낌도 없음을 안다.”(42쪽) 외딴 산골 곁방에서 홀로 기거하던 시인과 한 지붕 생활하던 ‘알록어깨꼬리흔들이새(?)’ 일가와의 즐거운 만남을 다룬 이야기가 오래 잔영으로 머물렀다. 시인은 마루 모퉁이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빨랫줄에 앉은 티스푼만한 새가 부리에 먹이를 물고 꼬리를 가늘게 흔들며 울고 있었다. 옆옆방 처마밑 새끼의 먹이를 나르던 어미가 시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시인은 다음날부터 빨랫줄의 새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마음속으로 나는 괜찮다, 괜찮다, 그냥 들락거려도 괜찮다를 수없이 되뇌어보기도 했다.”(168쪽) 마지막은 「중세」(84쪽)의 전문이다.
우리가 아직 어렸던 / 30여 년 전만해도 중세中世였습니다. / 식구도 많았습니다. / 새들까지도 다 식구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다 같이 살았습니다. / 다 같이.
다 다르게 다 같이 살았습니다. / 지금은 다 같게 / ‘나’만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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