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
지은이 : 유홍준
펴낸곳 : 창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이 세상에 나온 지 25년이 흘렀다. 국내 최장수 시리즈 도서는 역사, 예술, 문화를 아우르는 방대한 지식을 절묘하게 엮고, 쉽게 풀어내는 저자의 내공에 힘입은 바가 컸다. 소설가 故 이문구는 말했다. “역마살도 유홍준의 경지에 이르면 문화재급이다.”라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은 서울의 옛 경계인 한양도성, 자문밖(탕춘대, 홍지문, 세검정, 석파정, 부암동 별서), 조선왕조 마지막에 등장하는 궁궐 덕수궁, 동관왕묘, 조선왕조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성균관에 발품을 팔았다. 서울의 한양도성은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잇는 총길이 18.627킬로미터로 약 47리나 되었다. 전란을 대비해 쌓은 성곽이 아닌, 수도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위해 두른 울타리였다.
자문밖 부암동 일대는 ‘한양 최고의 별서(別墅) 터’로 안평대군의 무계정사, 흥선대원군의 석파정, 반계 윤웅렬 별서, 추사 김정희의 별서가 있었다. 부제 「有酒學仙 無酒學佛(유주학선 무주학불)」는 ‘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는 뜻이다. 석파 흥선대원군의 「석란도」중 하버드 대학의 아서 M. 새클러 뮤지엄에 소장된 10곡 병풍 제4폭에 찍힌 문자 도장이었다. 표지 사진은 승천하는 용의 형상을 닮은 한양도성이다. 미국의 미술평론가 엘리너 하트니(Eleanor Heartney)는 말했다. “서울은 동서남북 어느 시점에서 보아도 아름다운 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에 파리의 에펠탑 같은 랜드마크 건축물이 필요 없는 도시”라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서울편 9권과 10권에 강화도가 세 번 등장한다. 궁궐, 종묘, 왕릉에 사용되던 박석은 강화도 석모도에서 다시 채취하여, 2007년 광화문 월대 복원 때부터 사용했다. 창경궁 문정전과 숭례문 방화범은 정부 재개발 보상금에 불만을 품고 일을 저질렀다. 강화도 사람으로 아직도 나의 기억은 또렷했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하여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이듬해 방에 가두고 불을 때어 죽이는 증살을 했다. 계축옥사(癸丑獄事, 1613년 3월)라 한다.
성균관 유생들이 공론을 관철하거나 절조를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싸운, ‘권당(捲堂)-단식투쟁과 공관(空館)-동맹휴업’ 꼭지를 읽으며, 주문도에서 만난 두 동생을 떠올렸다. 그들은 성균관대 운동권 출신이었다. 뒤늦게 시작한 일상의 무게가 평범하게 살아온 이들보다 버겁게 느껴질 것이다. 어느덧 살아온 길을 뒤돌아 볼 나이인 지천명(知天命) 이었다. 술자리에서 말했다. “나는 운동권 출신을 편애한다”고. 나를 비롯해 지나친 음주벽이 문제였지만, 8·90년대 엄혹한 현실을 정면돌파한 후유증이라고 위로하고 싶었다. 자신과 가족이 아닌 사회적 약자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그들의 젊음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약자의 눈물에 마음이 아팠던 그들의 순결한 영혼이 조국의 민주주의를 이만큼 키웠다. 한겨울 광화문 광장의 촛불집회에서 만난 동생은 여전했다.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올바른 길에 두 발을 굳게 디딘 삶을 살아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의 변화에 무임승차하는, 쉽게 살아가는 이들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월은 여전했다. 마지막은 두 동생에게 바치는 헌시(獻詩)로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의 전문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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