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어느 별의 지옥
지은이 : 김혜순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그곳, 불이 환한 / 그림자조차 데리고 들어갈 수 없는 / 눈을 감고 있어도 환한 / 잠 속에서도 제 두개골 펄떡거리는 것이 / 보이는, 환한 / 그곳, 세계 제일의 창작소 / 끝없이 에피소드들이 한 두릅 썩은 조기처럼 / 엮어져 대못에 걸리는 / 그곳, / 두 뺨에 두 눈에 두 허벅지에 / 마구 떨어지는 말 발길처럼 / 스토리와 테마 들이 만들어져 떨어지는 / 그곳, / 밖에선 모두 칠흑처럼 불 끄고 숨죽였는데 / 나만 홀로 / 불 켠 조금만 상자처럼 / 환한 / 그곳,
첫 시 「그곳 1」(13쪽)의 전문이다. 시집은 「그곳」 연작시 여섯 편으로 시작되었다. 몇 년 묵혔다가 시집에 실린 「그곳」 연작시는 모두 일곱 편이었다. 두 번째 「시인의 말」에서 밝혔듯이 일곱 번째 시는 검열에 걸릴 것 같아 뺐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시인은 대학을 졸업하고 〈평민사〉와 〈문장〉 두 군데 출판사에서 밥벌이를 했다. 출판사에서 노동운동을 선구적으로 한 여성의 일대기를 번역서로 출간했다. 책의 역자 연락처를 대라고 시인은 경찰서에서 뺨 일곱 대를 맞았다. 시인은 출판사를 결근하고 뺨 한 대에 시 한편을 썼다. 전두환 군홧발 정권의 80년대는 시인에게 맑은 날이 하루도 없는 나날이었다. 시인에게 이 땅은 『어느 별의 지옥』이었다. 1980년대 한국의 정치상황은 감시와 검열과 통제와 고문이 난무했다. 미쳐 날뛰는 국가폭력의 그곳은 없던 일도 사실로 조작했다.
시집은 4부에 나뉘어 56 시편이 실렸다. 해설은 문학평론가 오연경의 「그곳, 그날, 그리고 지금 - 여기」로, 부제는 ‘시적 정치성의 분수령’이었다.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은 초판본이 1988년 〈청하〉에서, 1997년 〈문학동네〉에서 두 번째 재출간되었고, 2017년 〈문학과지성 시인선R〉 시리즈로 복간되었다. 시인은 1979년 《문학과지성》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첫 시집 『또 다른 별에서』(문학과지성사, 1981)에서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 2016)까지 열두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대상을 주관적으로 비틀어 만든 기괴한 이미지들과 속도감 있는 언어 감각으로 자신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 김혜순(金惠順, 1955~ )의 시는 난해함으로 다가왔다. 시인에게 미안했다. 정치의식(?)이 강한 나의 책읽기에서 시인은 나의 헐거운 그물코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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