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집이 떠나갔다
지은이 : 정우영
펴낸곳 : 창비
여기 한 시인이 있다. 1989년 『민중시』에 시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했다. 그 시절은 ‘현실변혁을 꿈꾸는 집단적 열망이 한 시대의 분수령에 도달한 시점’이었다. ‘겸손하고 소박하고 과묵하면서도 늘 주위 사람을 편안하게 배려’한 마음 여린 시인은 역사적 책무를 피하지 않았다.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의 지친 삶을 보듬으려는 따뜻한 애정’과 ‘현실에 맞서서 세상을 바꾸어보려는 열정과 의분’은 『노동해방문학』의 편집과 제작을 맡았다. 그 시절 ‘노해문’의 적개심과 전투성을 현실모순을 회피하지 않은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계급투쟁의 최일선에 복무했던 잡지를 펴냈던 이들은 하나같이 순하다 못해 여려터진 시인과 문학인들이었다. 시인 정우영, 김사인, 강제윤. 그리고 『집이 떠나갔다』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임홍배 등.
『민중시』를 통해 등단한 시인은 첫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문학동네, 1998)을 상재했다. 당연히 억눌리고 소외된 삶을 보듬는 시인의 시선이 따듯했다. 서해 낙도 오지에 삶터를 꾸리고 자칭 얼치기 생태주의자를 자처하며, 나는 눈에 불을 켜고 생태시를 찾았다. 마음만 급했지 내공이 형편없었던 내게 시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런데 시인의 두 번 째 시집 『집이 떠나갔다』의,
마흔여섯 해 걸어다닌 나보다 / 한곳에 서 있는 저 여린 생강나무가 / 훨씬 더 많은 지구의 기억을 / 시간의 그늘 곳곳에 켜켜이 새겨둔다.
홀연 어느날 내 길 끊기듯 / 땅 위를 걸어다니는 것들 모든 자취 사라져도 / 생강나무는 노란 털눈 뜨고 / 여전히 느린 시간을 걷고 있을 것이다.
지구의 여행자는 내가 아니라, / 생강나무임을 아프게 깨닫는 순간에 / 내 그림자도 키 늘여 슬그머니 / 생강나무의 시간 속으로 접어든다.
시집을 여는 첫 시로 서시(序詩)에 해당되는 「생강나무」가 어느날 벽력처럼 눈에 들어왔다. 세 번째 시집 『살구꽃 그림자』(실천문학사, 2010)는 아쉽게 품절이었다. 기다리면 언젠가 손에 넣을 것이다. 시인은 두 번째 시집부터 ‘생태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원초적 생명감’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보다 생태적 상상력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치유했다. 진짜 생태시인이 이제 눈에 뜨였다. 시인 도종환은 말했다. “대지의 모성성으로 돌아가는 시인”이라고. 「시인의 말」이 아프게 눈을 찔렀다.
분노보다는 위로에 더 눈길이 간다. 요즈음엔 특히 작은 것, 잘 잊히는 것, 쉬 멀어지는 것, 이를테면 사금파리 같은 것들에 부쩍 끌린다. 눈에 잘 띄지 않아도 그 자리에 없으면 어쩐지 허전한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