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기억이동장치

대빈창 2018. 6. 22. 06:01

 

 

책이름 : 기억이동장치

지은이 : 신영배

펴내곳 : 문학과지성사

 

사라지는 시를 쓰고 싶다

눈길을 걷다가 돌아보면 사라진 발자국 같은

봄비에 발끝을 내려다보면 떠내려간 꽃잎 같은

전복되는 차 안에서 붕 떠오른 시인의 말 같은

그런 시

사라지는 시

쓰다가 내가 사라지는 시

 

1부 마지막 시 「시인의 말」(39쪽)의 전문이다. 시집은 3부에 나뉘어 48 시편이 실렸다. 해설은 문학평론가 이광호의 「흐르는, 증발하는 그녀들의 환상통로」다. 시인은 2001년 『포에지』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인의 말∥은 2006년과 2015년 두 편이 실렸다. 2006년 첫 시집 『기억이동장치』(열림원, 2006)가 나왔다. 절판되었던 시집은 2015년 〈문학과지성 시인선 R 08〉로 재출간되었다. 시인은 『그 숲에서 당신을 만날까』(문학과지성사, 2017)까지 4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시인은 충남 태안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말이 없는 작은 소녀였다. 열네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죽음에 대한 슬픔과 공포의 기억이 첫 시집에 ‘흐르고 증발’했다. 고교 졸업 때 선생님이 건네 준 김수영 시집을 읽고 문학에 눈을 떴다.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다 스물네 살 뒤늦은 나이에 서울예대 문창과에 입학했다. 가난한 시인은 17년 동안 서울의 작은 원룸촌을 전전했다. 시인에게 미안했다. 나는 어리석게 이름을 보고 남성이라고 짐작했다. 그동안 나의 책읽기는 시와 거리가 멀었다. 편집증적 강박증으로 〈문학과지성 시인선 R〉 시리즈를 잡지 않았으면, 나는 시인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전에 나왔다가 절판된 책을 출판사를 옮겨 다시 펴내는 재출간 바람이 출판계에 불고 있다. 나는 뒤늦게 시집을 펼치는 재미에 빠져 들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R〉시리즈의 첫째 권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이성복, 2012)부터 『황색예수』(김정환, 2018)까지 열네 권의 시집이 빠짐없이 책장에 어깨를 나란히 했다. 재출간전문 출판사 《최측의농간》와 신생 출판사 《펄북스》와 《느린걸음》에서 펴낸 시집에 자주 눈이 갔다. 《문학동네》도 절판된 시집을 아우르는 복간시집 시리즈를 펴낼 계획이다. 반가운 소식이다. 뒤늦은 나이에 시집을 잡으며 어쩔 수 없이 커다란 공백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래들이 문학공부를 하던 시인들의 시집을 뒤늦게나마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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