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아차도 밤나무 숲길

대빈창 2018. 10. 4. 07:00

 

 

겨울밤 창밖에 눈은 내리는데 / 삶은 밤 속에 밤벌레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 죽은 태아처럼 슬프게 알몸을 구부리고 / 밤벌레는 아무 말이 없었다 // 그날부터 나는 삶은 밤은 먹지 않았다 / 누가 이 지구를 밤처럼 삶아 먹는다면 / 내가 한 마리 밤벌레처럼 죽을 것 같아서 / 등잔불을 올리고 밤에게 용서를 빌었다

 

글머리를 정호승의 「밤벌레」로 시작했습니다. 나의 나무로 점찍어둔 봉구산 초입 밤나무의 알밤이 저절로 떨어져 땅바닥에 뒹굴었습니다. 바구니 속 알밤마다 영락없이 몸이 통통하고 보유스름한 밤벌레가 기어 나옵니다. 꿀꿀이바구미의 애벌레라고 합니다. 성충은 쌀바구미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밤이 익기 전에 밤송이 안쪽에 알을 낳는다고 합니다. 이미지는 아차도 마을 뒷산의 밤 과원을 관통하는 숲길입니다. 알밤이 떨어져 길 위에 뒹굴어도 누구하나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백여 그루의 고목이 된 밤나무에서 떨어진 알밤이 고즈넉한 길가와 수풀 속에 찾는이 없이 널렸습니다. 아차도의 묵은 밤나무를 돌 볼 젊은이가 없습니다. 해충 방제는커녕 방치된 밤나무에서 떨어진 알밤은 여지없이 밤벌레 차지였습니다.

아차도는 0.54㎢의 면적에 20여 가구에 40여명이 사는 작은 섬입니다. 제가 알기로 50세 이하의 섬주민이 한 분도 안 계십니다. 명절 때나 고향을 찾는 대처로 나간 자식들을 기다리며 노인네들이 소일거리로 고구마, 고추, 땅콩 농사를 지으십니다. 아차도의 논 면적은 고작 3000평 정도입니다. 그중의 반을 외지인 한 분이 섬을 드나들며 농사를 짓습니다. 모내는 이앙기와 벼를 베는 콤바인이 없는 섬에 농번기가 돌아오면 이웃 섬의 일꾼과 영농기계가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아차도의 선창은 폭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주문도의 선창과 마주보고 있습니다. 강화도를 오가는 도선이 아차도에 사람을 내리고 뒤돌아서면 바로 주문도입니다.

오랜만에 아차도에 발걸음을 했습니다. 선창에서 내려 느린 걸음으로 20여분 해변 언덕을 올라서면 양지바른 산자락에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습니다. 아차도는 태극기 마을입니다. 제방 월파벽에 게양된 태극기가 일렬로 늘어섰습니다. 집집마다 일년내내 태극기가 펄럭입니다. 어른신네들은 밭에 나가셨는지 인적 없는 고샅에 개들만 사납게 짖어댔습니다. 마을을 가로질러 뒷산의 경사진 고갯길을 오릅니다. 아차도의 밤나무 숲길은 한낮에도 그늘이 짙었습니다. 길바닥에 알밤이 뒹구는 숲길을 벗어나자 볼음도 선창이 마주 보였습니다. 아차도의 송전탑이 무인도 수리봉의 철탑을 거쳐 볼음도로 연결되었습니다. 처음 서도에 발을 들였을 때 수리봉에 저어새가 살았습니다. 섬을 찾는 외지인들이 늘면서 녀석들은 보금자리를 먼 바다 무인도로 옮겼습니다. 수리봉의 저어새가 새끼에게 부리로 먹이를 물려주고, 아차도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날이 다시 올지 모르겠습니다. 밤나무 숲길의 알밤을 줍는 장난꾸러기 꼬맹이들이 그리운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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