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라면을 끓이며
지은이 : 김훈
펴낸곳 : 문학동네
독서 산문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 작가가 자전거 풍륜(風輪)을 타고 이 땅의 산하를 누비며 쓴 기행 산문집 『풍경과 상처』, 『자전거 여행』, 『자전거 여행 2』, 문학 기행집 『제비는 푸른 하늘 다 구경하고 하나·둘』, 소설집 『강산무진』이 책장에 있는 김훈의 책들이다. 그리고 장편소설은 주민자치센터에서 대여한 『공무도하』가 유일했다. 김훈의 대표작은 누가 뭐래도 2001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칼의 노래』다. 하지만 소설집을 편식하는 나는 200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화장」과 2005년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언니의 폐경」이 담긴 『강산무진』을 잡았을 뿐이다.
나는 김훈의 소설보다 산문에 더 애착이 갔다. 어느 시인·문학평론가는 김훈을 일러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세대의 몇 안되는 글쟁이 중의 하나”라고 극찬했다. 아마도 이 명성은 김훈의 ‘세설(世說)’ 산문집으로 유명한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 『밥벌이의 지겨움』, 『바다의 기별』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작가의 대표 산문집을 손에 잡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책을 군립도서관에서 대여했다. 책은 세 권의 산문집에서 재수록한 글이 2/3를 차지했다. 작가의 탁월한 산문을 우려먹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한 출간이었다. 412쪽의 양장본 산문집은 5부 - 밥(13), 돈(10), 몸(13), 길(14), 글(3)이라는 다섯 가지 홑글자의 소제목에 나뉘어 53개의 글이 실렸다.
작가의 발걸음은 경북 울진 죽변 후정리 바닷가와 경기만의 한 섬에, 만경강 갯벌에 머무르고, 미크로네시아 섬 연방과 압록강 하구와 중국 단동(丹東)을 거쳐 통화·집안과 두만강 하구의 풍경을 담았다. 가장 쓸쓸했던 글꼭지는 「고향 1」(307 ~ 316쪽)의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자본의 폭력에 속수무책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힘없는 민중들이었다. 새만금 물막이 공사가 끝나면 떠나야하는 만경강 하구마을의 염부 전철수. 탐진댐 공사로 마지막 남은 수몰민 장흥 지천리의 마덕림 할머니, 강원 사북의 산재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중증진폐환자 김모씨와 카지노 딜러로 일하는 늙은 광부의 딸 김선씨(가명)의 삶은 무참했다.
가장 감동적인 글은 마지막 꼭지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였다.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그날은 ‘타는 목마름으로’의 시인 김지하가 영등포교도소에서 출감하는 날이었다. 작가는 그 시절 신문기자로 밥벌이를 했다. 교도소 정문 맞은 편 얕으막한 언덕의 초로의 여인네의 실루엣이 기자의 눈에 띄었다. 간난아이를 들쳐 업은 포대기는 낡아 보였다. 밤 9시경 출소한 김지하는 환영인파에 휩싸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백기완은 또다른 벌금형 전과로 석방이 늦어지고 있었다. 즉석에서 모금이 시작되었다. 여인네는 아이를 감싼 포대기를 뒤적여 만원 권 몇 장을 꺼냈다. 그리고 대절해 온 택시에 몸을 실었다. 여인네는 소설가 박경리였다. 그때 등에 업힌 외손주는 태어난 지 백일도 채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