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무한화서
지은이 : 이성복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1980년 10월.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이성복(1952 ~ )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때 총통을 꿈꾸던 독재자가 부하의 총탄에 비명횡사하고, 전두환 쿠데타 세력이 불법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그해 7월, 신군부 세력은 문화적 폭거를 단행했다. 『문학과지성』과 『창작과비평』을 강제 폐간했다. 시집은 지그재그식 불규칙한 시열의 배열, 거꾸로 끼워넣은 활자, 역설과 반어의 난무, 비어와 속어의 위악적인 어조, 말의 생략과 반복 등 세계를 비꼬고 풍자한 시집을 문학평론가 스승인 김현은 ‘따뜻한 비관주의’로 읽었다. 시집은 1980년대 새로운 해체 시법의 한 전범으로 시인을 떠올렸다.
1980년대 이후의 시인들은 이성복의 세례를 받으며 문단에 등단했다. ‘시인들의 시인’으로 불리는 그가 강의록, 강연 등을 엮은 세 권의 시론집을 펴냈다. 시인이 40년 동안 시를 쓰면서 궁구한 시적 사유의 정수가 실린 시쓰기 방법론이었다. 나는 그중 『무한화서(無限花序)』를 마지막으로 잡았다. 여기서 ‘화서(花序)’는 순우리말로 ‘꽃차례’라고 하는데,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을 이른다. 성장이 제한된 ‘유한화서’는 위에서 아래로, 속에서 밖으로 핀다. ‘무한화서’는 성장에 제한이 없는 밑에서 위로, 밖에서 속으로 피는 방식을 일컫는 식물용어다. 시인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인 시는 무한화서라고 생각했다.
책은 2002년에서 2015년까지 대학원 시 창작 수업 내용을 471개의 아포리즘(잠언) 형식으로 정리했다. 서언을 포함하여 삶에 붙박힌 여러 깨달음과 성찰, 시와 문학으로 나아가는 절묘한 은유를 담은 한 줄부터 두 쪽 분량까지 짧은 글모음집이었다.
“다친 새끼발가락, 이것이 시예요.”(108쪽, 278꼭지)
시인은 책에 서명할 때 이 말을 가장 자주 쓴다. 몸의 말단 중의 말단이 새끼발가락인데, 이게 아프면 움직일 수도 없도 뛸 수도 없다. 이게 바로 시와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