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대빈창 2019. 7. 11. 07:00

 

 

책이름 :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지은이 : 김일영

펴낸곳 : 실천문학사

 

달빛 계곡 꿈을 꾸면 / 쪽배가 저보다 큰 텔레비전을 싣고 / 울 아버지, 하얗게 빛나는 이빨 앞장세워 돌아오듯 / 이제 다친 길을 어루만지며 그만 돌아와 /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여린 삐비꽃을 씹으며 / 애들 소리 사라진 언덕에 앉으면 석양은 / 머리가 하얀 사람들 애벌레처럼 담긴 마당에 / 관절염의 다리를 쉬다 가고 / 빚으로 산 황소가 무릎을 꺾으며 / 경운기 녹슬고 있는 묵전을 쳐다보는 곳 / 그대가 파도 소리에 안겨 젖을 빨던 / 그 작은 섬으로

 

등단작이며 표제시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32 ~ 33쪽)의 3·4연이다. 시인은 200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김. 일. 영. 요즘 들어 시집을 즐겨 손에 잡았지만 생소한 시인이었다. ‘삐비꽃’에서 나는 즉각 ‘삘기’를 떠 올렸고, 어릴 적 추억 한 토막을 건졌다. 항상 배고팠던 그 시절. 꼬맹이들의 호주머니에 ‘젓칼’이 들어있었다. 가을이면 풋콩을 짚불에 구웠고, 길가 밭의 고구마, 감자, 무를 깎아 주린 배를 채웠다. 늦은 봄이나 초여름의 풋보리 이삭을 따 짚불에 구운 보리그스름과 3대 간식으로 싱아(수영), 송기(어린 소나무 가지의 얇은 속껍질), 삘기가 있었다. 여기서 ‘삐비꽃’은 삘기로 띠의 어린 새순이었다. 꽃이 피지 않은 어린 이삭을 날것으로 먹었다.

시집은 3부에 나뉘어 54 시편이 실렸다. 해설은 좋아하는 문학평론가 이명원의 「말랑말랑한 귀 - 김일영 시의 특이성」이다. 문학평론가는 “귀로 만져야 할 작품들”이라면서 “감각하거나 지각하는 공감각적 추구는 초월성을 강력하게 환기시키고 있다.”고 평했다. 해설을 읽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시인과 문학평론가는 큰 섬 완도에 딸린 작은 섬이 고향이었다. 시인은 생일도, 문학평론가는 금당도였다.

시인의 첫 시집으로 2009년에 초판이 나왔다. 출간된 지 10여 년이 지난 묵은 시집은 표지 디자인에 변화를 준 안상수 디자이너의 두 번째 작품이었다. 시인의 고향을 찾은 디자이너는 생일도 황톳길에 뒹구는 동백꽃과 노을이 비껴 떨어지는 섬의 색깔을 붉은 색 표지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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