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대빈창 2019. 6. 28. 07:00

 

 

책이름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지은이 : 박노해

펴낸곳 : 느린걸음

 

고모님이 돌아가셨다

전쟁의 레바논에서 임종도 전해 듣지 못하고

나는 뒤늦게 전라선 열차를 타고

다시 순천에서 동강 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붉은 황토 길을 걸어 고모님을 찾아간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공장으로 떠난 뒤

너무 힘들고 외로운 날이면 타박타박

삼십 리 길을 걸어 찾아가던 고모 집

 

밭일을 마친 고모님은 어린 나를 와락 끌어안고

눈물바람으로 밥을 짓고 물을 데워 몸을 씻기고

재봉틀을 돌려 새 옷을 지어 입히고 이른 아침

학교 가는 나를 따라나와 까만 점이 될 때까지

손을 흔들고 계셨지

 

경주 교도소 접견창구에서 20년 만에 재회한 나를

투명창 너머에서 쓸어 만지며 수배 길에 행여나

찾아들까 싶어서 밤마다 대문을 열어놓고

건넛방에 풀 먹인 요와 이불을 깔아놓고 사셨다며

무기징역살이를 어쩌냐고 흐느끼던 고모님

 

이제 그 작고 다숩던 나의 고모님은

여자만 갯벌바다가 보이는 무덤에 누워 계시고

나는 무덤 위에 두 팔을 벌리고 엎드려

처음으로 고모님을 오래도록 안아 드린다

 

늘 꽃이 피던 고모님 집은 텅 빈 적막

얼마 전까지 손에 잡던 반질반질한 호미며 괭이며

꽃밭의 원추리, 패랭이꽃, 금강초롱, 꽃창포

처마밑에 정갈히 싸매 단 씨앗봉지들

윤나게 닦아진 종이 장판과 낡은 재봉틀과

앉은뱅이 책상에 가지런히 놓인 내 시집들과

아, 신문에서 오려 붙인 수갑 찬 내 흑백 사진들

 

나는 빈방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서

앉은뱅이 책상을 열어보다 금이 간 돋보기 안경과

오래된 묵주와 비녀와 재봉 가위와 참빗을 만져보다가

고모님의 낡은 치부책을 펼쳐본다

 

연필로 꾹꾹 눌러 쓴 고모님의 공책에는

장날 사 쓴 물품들과 돈의 숫자는 드물고

민자네 고구마밭 반나절, 모내기 사흘,

마늘 수확 이틀, 품앗이 기록과

용주네 논갈이 하루 반, 순재네 장작 여섯 짐,

품앗이 노동의 기록들이 꼼꼼이 적혀 있다

 

고모님은 돌아가시기 한 달 전부터는

몹시도 힘이 부치셨나 보다

이웃집에 도움받은 창호문 수리 반나절과

무너진 장독대 돌쌓기와 논에 퇴비내기가

갚아야 할 품으로 적혀 있다

 

나는 치부책 끝 부분의 최근 기록을 살피고 난 후

작업복을 갈아입고 이웃집을 찾아간다

한사코 마다하는 그이를 따라 비닐하우스 일을 돕고

경운기 뒤에 타고 가서 농수로 파는 일을 거들고

유자밭에 솎아내기를 마치고 막걸리에 홍어회로

배를 채운 뒤 고모님의 빈집을 나선다

 

한참을 걷다 돌아보고 산굽이 넘어 다시 돌아보고

저기 동구 밖 지나 마을 숲까지 따라나와

까만 점으로 손 흔들고 서 계신 나의 고모님

작은 몸매로 거인처럼 빛나는 나의 고모님

이제 나 다시는 고모님 집을 찾지 못하리

 

나는 남은 생을 다해도 갚을 수 없는

눈물 그렁한 사랑의 빚을 가슴에 품고

여자만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고모님의 황토 길을

내 몸 안으로 내어가며 걸어가고 있었다

 

※ 「고모님의 치부책」(500 - 503쪽)의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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