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영초언니

대빈창 2019. 6. 26. 07:00

 

 

책이름 : 영초언니

지은이 : 서명숙

펴낸곳 : 문학동네

 

내가 (사)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을 처음 접한 책은 보길도 시인 강제윤의 『올레, 사랑을 만나다』(예담, 2010)이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저자는 23년간 몸담은 언론계를 떠나 ‘산티아고 순례’에 나섰다가 고향 제주에 평화롭고 아름다운 순례길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다. 조폭 두목이었던 친동생 서동철이 올레길 개척대장이었다. 대학 시절, 저자가 겨울방학 서귀포 집에 내려왔을 때, 대학 측이 특별 관리하는 ‘문제 학생’으로 찍힌 것을 부모님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땅벌파’의 조직 두목이었던 동생은 폭력사건으로 제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겨울 찬물에 콩나물을 씻는 어머니의 손이 벌겋게 부풀어 오른 것을 먼발치에서 본 저자는 ‘비겁해져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했다.

서명숙은 제주도 남쪽 서귀포에서 ‘서명숙상회’의 딸로 태어났다. 제주 명문여고를 나와 고려대 76학번으로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천영초는 고려대 72학번 신문방송학과 출신으로 운동권의 전설이었다. 고대신문 창간기념 뒤풀이에서 만난 천영초와 서명숙은 의기투합하여 서울 동쪽 수유리의 낡은 주택 문간방의 천영초 자취방에서 생활을 함께 했다. 사회적 약자의 눈물에 가슴 저렸던 두 젊은 여성은 극랄한 군사독재 정권에 맨 손으로 맞섰다. 박정희 유신정권 수립, 긴급조치 발동, 동일방직 노조 똥물 사건, 박정희 암살, 5·18 광주민중항쟁, 86년 6월 대항쟁 등 격동의 역사 한가운데를 정면 돌파했다. 열정과 분노로 뒤범벅이 되어 독재정권의 부당성을 고발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담은 유인물을 등사기로 밀고 대학가에 뿌렸다.

1979년 4·19기념일을 앞두고 천영초와 서명숙은 일명 ‘산천초목’사건으로 연행되었다. 군사독재 정권의 기획수사의 먹이감이 된 것이다. 천영초는 남영동 대공분실에, 서명숙은 허름한 모텔을 개조한 밀실에 갇혔다. 두 젊은 여성은 온갖 고문에 시달렸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끝내고,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성동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뒤이어 ‘YH무역 노조 신민당사 농성사건’의 주역 3인방이 들어왔다. 구치소 여사(女舍)에서 부마항쟁, 박정희 암살 사건을 맞았고, 마침내 ‘서울의 봄’으로 236일 만에 출소했다. 폭압적인 야만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1980년 5월 천영초와 서명숙은 군부 쿠데타의 천인공노할 광주민중 학살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 광주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천영초의 이모 말에 의하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두 처녀"였다.

천영초는 ‘서울대 3대 기인’으로 운동권의 전설이었던 정문화와 결혼했다. 한국 현대사의 한 축을 견인했던 커플은 평범한 행복을 꿈꾸었다. 남편은 민중당의 대변인, 아내는 여성특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한국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이었던 이들에게 현실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아들의 ‘왕따’ 학교생활을 보다 못한 천영초는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이혼 후 고국에 홀로 남은 정문화는 어렵게 생을 이어가다 삶의 끈을 놓았다. 2002년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소소한 인생의 행복을 맛보던 천영초는 큰 교통사고를 당해 두 눈이 멀고, 뇌의 60 ~ 70퍼센트가 손상되어 세 살 아이 지능수준이 되고 말았다. 모태 신앙인 천영초가 겪는 고난과 불운은 끝이 없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저자의 혼잣말을 떠올렸다.  “주 예수와 하느님 아버지가 과연 있기나 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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