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하룻밤 돌배나무 아래서 잤다

대빈창 2019. 10. 28. 04:49

 

 

책이름 : 하룻밤 돌배나무 아래서 잤다

지은이 : 김남극

펴낸곳 : 문학동네

 

흥정리 마가리 개울은 아직 얼음판이고 / 유포 금당산 아래로 흐르는 얼음강 가운데로 물길이 나면 // 매자는 들뜬 돌 속으로들 모여 지느러미를 살살 흔들며 몸을 풀겠다 / 탱바리는 땅돌 속에서 등지느러미 속 침을 벼리며 뒤척이겠다 / 괴리나 불괴리떼는 귀퉁이 두꺼운 얼음판 밑에서 / 물살 속으로 지느러미를 뻗어 온도를 재며 낄낄 웃겠다 / 뚜꾸뱅이는 퍽석 헤져 새 가족을 이루러 상류로 올라갈 꿈에 그 까만 눈을 깜박거리겠고 / 꺽지는 등지느러미 속 뼈를 바짝 세우며 / 건방지게 해빙의 물길을 가로지르는 참버들치떼를 노리며 섰겠고 // 개울가 바위에 올라가 물속을 노린다 / 물속에 고기가 없다 / 누구는 먹이를 노리고 누구는 흐름을 노리고 / 또 누구는 세상을 노린다 / 해빙 무렵엔

 

「해빙 무렵」(28 - 29쪽)의 전문이다. 문학평론가 유성호는 해설 「오지의 슬픔, 그 기원과 내력」에서 시인의 시 세계를 ‘오지의 시학’이라 규정했다. 산간벽촌이 생활터전인 시인의 첫 시집은 3부에 나뉘어 61시편이 실렸다. 나는 산간벽지의 오지하면 깊은 계곡의 물고기가 먼저 떠올랐다. 매자·탱바리·괴리·불괴리·뚜꾸뱅이·꺽지·참버들치 등 깊은 산속 일급수 계류에 사는 물고기의 생태를 묘사한 시편이 시인의 현재적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요즘 즐겨 시집을 잡았지만, 나의 아둔한 주파수에 시인은 잡히지 않았다. 표제에서 전북 진안 마이산 은수사의 청실배나무를 떠올렸다. 학창시절 답사차 들른 절의 주지는 개량과 보급이 되면 좋겠다며 우리 일행에게 청실배나무 씨앗을 건네주었다. 시집의 마지막을 덮으며 나는 세 문인을 떠올렸다. 시인 백석과 강제윤 그리고 소설가 이효석이었다. 시집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지형이 ‘마가리’였다. ‘골짜기 맨 끝’이라는 의미의 ‘마가리’를 한국 현대시의 어휘 목록에 확고하게 등재시킨 이가 백석이었다. 백석의 대표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시인은 나타샤와 마가리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진이 다 빠졌네」(98 - 99쪽)의 1·2연은

 

먼 섬에서 태어난 시인이 자정 넘어 전화를 했다 / ‘집 한 채 지으니 진이 다 빠졌어. 진이’

 

여기서 먼 섬은 보길도이겠고, 시인은 분명 강제윤이었다. 진이 다 빠지면서 완성된 집은 보길도 고산 윤선도 유적 세연정 부근의 돌집 ‘동천다려’일 것이다. 시인은 이효석 문화제를 주관하는 《가산문학 선양회》의 사무국장이었다. 그는 학창시절 7년을 제하고 고향 봉평을 떠나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한국인이라면 강원 봉평은 곧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었다. 그 이면에 시인의 눈에 뜨이지 않은 노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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