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코끼리

대빈창 2019. 10. 18. 07:00

 

 

책이름 : 코끼리

지은이 : 김재영

펴낸곳 : 실천문학사

 

소설은 구성부터 특이했다. 달팽이 ‘나’와 한국 남자 ‘그’의 시점으로 번갈아 서술되었다. 나(달팽이)는 러시아 민속무용단원으로 한국에 온 시베리아의 아름다운 처녀 쏘냐의 짐에 우연히 휩쓸려 한국에 오게 되었다. 한국인 악질 브로커 최의 술수에 말려 들어 쏘냐는 밤무대 퇴폐업소에서 반나체 춤을 추는 것도 모자라, 사창가에 몸을 팔게 될 처지에 놓였다. 그녀는 성폭행하려는 브로커 최를 상해하고 도망치다 뺑소니차에 치여 정신을 잃었다. 그는 운동권 학생출신으로 시대가 변하면서 러시아 유학을 다녀왔다. 옛 동지였던 그녀의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향하다 길거리에 쓰러진 쏘냐를 발견한다. 그녀를 병원 응급실로 옮기고 어쩔 수없이 보호자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아홉 개의 푸른 쏘냐」의 줄거리다. 2007년 《생각의나무》에서 나온 13편의 중·단편 엔솔로지 소설집 『소설 이천년대』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은 작품이었다. 그리고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책 리뷰를 서핑하다 다시 소설을 만났다. 강화도에 나가면서 군립도서관에 들렸다. 다행히 2005년에 출간된 작가의 첫 소설집 『코끼리』가 있었다. 소설집은 10개의 중·단편 소설과 문학평론가 정호웅의 해설 「절망과 고통의 현실, 연민의 마음」으로 구성되었다. ‘검게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로 쏟아지던 초여름의 햇빛과 하얀 최루가루 속에서 죽어간 김귀정.’(327쪽) 386세대 작가답게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뒷얘기가 자주 등장했다.

김재영은 우리 문단에서 알게 모르게 외면해 온 외국인 노동자의 아픈 현실을 가장 앞서 다룬 작가였다. 소설집의 표제작으로 첫 작품인 「코끼리」는 국내의 현대문학 교수 350명이 뽑은 ‘2005 올해의 문제 소설’과 작가들이 뽑은 ‘2005 올해의 좋은 소설’로 선정되었다. 「코끼리」는 가난한 나라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노동력을 팔러 온 외국인 노동자들의 고통스런 삶을 다루었다. 천문학을 전공하다 한국에 온 네팔인 아빠와 조선족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열세 살의 나는 문서상에 없는 불법체류자다. 돼지 축사를 개조한 쪽방 가옥에 네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러시아 이주노동자들이 5개의 단칸방에 나누어 살았다. 소년이 사는 옆방 비재 아저씨는 막내아들 수술비로 부지런히 돈을 모았다. 룸메이트였던 방글라데시 청년이 돈을 훔쳐 날아나, 아저씨는 정신이 나갔다. 악착같이 돈은 모은 노랭이 인도 아저씨는 고향에 돌아갈 꿈에 부풀었다. 소년은 아버지의 생일날, 어두운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노랭이가 습격 받는 장면을 목격한다. 범인은 놀랍게도 실성한 비재아저씨였다.

소설을 읽어 나가는 나의 가슴은 납덩이가 들어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외국인노동자들의 분노와 슬픔에서 70 ~ 80년대 허울 좋은 수출역군이라는 미명아래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전태일로 대변되는 공돌이·공순이(?), 가난을 벗어나려 독일로 간 삼촌 세대의 광부와 간호사, 쏟아지는 햇볕아래 땀흘리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인부들, 그리고 미군기지 양색시와 일본인 기생관광을 떠올렸다. 작가는 말했다. “우리가 이들에게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이유는 1970 - 80년대의 그 치열한 노동운동으로 해결되지 않은 열악한 현장의 고통이 그대로 이들에게 전가됐기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