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내면 산책자의 시간

대빈창 2019. 10. 10. 07:00

 

 

책이름 : 내면 산책자의 시간

지은이 : 김명인

펴낸곳 : 돌베개

 

문단 기득권층의 성폭력 행태를 고발한 '미투(MeToo :나도 당했다)' 운동은 최영미 시인의 문단 원로 고은 시인의 성추문을 폭로한 시 「괴물」에서 시작되었다. 시가 실린 매체는 실천적 문학평론가 김명인이 편집주간으로 있는 진보 계간지 『황해문화』 2017년 가을호였다. 역시 김명인이었다. 다시 한번 돌이켜보자, 시 「괴물」을 이 땅의 3대 문학지 『창비』, 『문학과사회』, 『문학동네』에 실을 수 있었을까. 책장을 둘러보았다. 미안했다. 1997년 학고재에서 출간된 독일기행기 『잠들지 못하는 희망』이 유일했다. 두 권의 책을 손에 넣었다. 『내면 산책자의 시간』(돌베개, 2012)과 『부끄러움의 깊이』(빨간소금, 2017).

책은 저자가 안식년을 맞아 2011년 가을과 겨울을 영국 런던 남서쪽 변두리 서비튼에서 홀로 지내면서 아내에게 편지대신 블로그에 올린 일기를 책으로 엮었다. 저자가 말했듯이 ‘내 마음 길을 따라 걸었던 기행문’이었다. 김명인은 시대적 책무를 짊어졌던 젊은 날을 돌이키며 이렇게 술회했다. “갓 스물세살이던 1980년에는 민중혁명을 하자고 사람들을 선동했고, 서른 살이던 1987년에는 다시 민중혁명의 문학을 해야 한다고 마음 여린 문사들을 닦아 세웠”다. 40년 저편 서울대 학생으로 70년대 말 박정희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비합법 학생운동 그룹에 몸을 담았다. 이 말은 가난한 자, 힘 없는 자, 소외된 자, 핍박 받는 자, 억압 받는 자들의 해방 투쟁에 뛰어들어 목숨을 걸었다는 의미였다. 1987년 6월 대항쟁의 격문이었던 「지식인문학의 위기와 새로운 민족문학의 구상」으로 민족문학주체논쟁의 한가운데 서있었다. 

파리에 유학 온 딸 결이와 브르타뉴 지역을 여행하던 그해 12월 29일 밤 문학평론가는 한 펜션에서 ‘김근태 형의 부음’을 들었다. 그 소식은 저자의 회상을 31년 전 이맘 때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15호실로 끌고 갔다. 치욕의 시간, 치욕의 장소. 그리고 2년 8개월의 독방 감옥살이. 이 땅의 진정한 합리적 보수주의자 사회평론가 고종석은 김명인을 이렇게 말했다. “친구는 아마 혁명의 열정은 버렸겠지만 , 그에게는 여전히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꿈이 있다. 그의 글은 여전히 사회적 소수파를 옹호하고 기존의 굳은 권력 관계에 저항하여 사회를 조금씩, 앞으로 밀어내고 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를 좌파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마지막은 그림엽서(288 - 289쪽)에 담은 글귀 전문이다.

 

이 김 서린 북창(北窓)이 낯익다. / 건너편의 회벽과 흐린 하늘도. / 꼭 30년 전 그 작은 창과 닮았다. / 유리가 아니라 두 겹의 비닐로 덮인 그 창. / 입김을 불어 서린 김을 지워도 흐릿하기만 했던 / 창살로 막힌 그 창. / 내다보아야 흰 바람벽과 검은 지붕과 / 잿빛 하늘 한 조각뿐인 그 창. / 나는 무엇을 그려 돋움발까지 하고 / 그 작은 창을 하염없이 내다보았을까. / 무심히 내다보는 이 가을 아침의 북창. / 지금은 정말 아무것도 그립지 않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