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는 여말까지 강화 본도와 마리산지로 이루어진 고가도(古家島)로 분리되어 있었다. 당시 이들 두 섬 사이의 가릉포와 선두포 사이로는 조수가 통하였다. 그러므로 초지포구(草芝浦口)의 선박은 강화도 서남단을 우회하지 않고 이 수로를 통하여 석모리까지 갈수 있었다. 지리학자 최영준의 논문집『국토와 민족생활사』(한길사, 1997)의 「강화지역의 해안저습지 간척과 경관의 변화」에서 발췌했다. 여기서 석모리는 삼산면소재지가 있는 석모도의 석모리를 가리켰다.
하나의 섬이었던 고가도는 간척사업으로 강화도와 한덩어리가 되었다. 옛날 배가 오가던 수로는 현재 드넓은 가릉포 벌판이다. 오늘 서도(西島)행 삼보12호의 2항차 출항지는 화도 선수항이었다. 나는 차를 몰고 양도면소재지를 지나 가릉포 들녘을 일직선으로 가르는 도로를 탔다. 멀리 마니산 정상 참성단이 한눈에 들어왔다. 화도면소재지 내리에서 우회전했다. 화도 후포항은 ‘강화군 특색음식 거리’로 〈선수 밴댕이 마을〉이다. 후포항을 지나 한 굽이 고개를 넘으면 위 이미지의 선수항이 나타났다. 바다건너 겹쳐지고 늘어진 산주름은 관음도량 보문사가 자리 잡은 석모도다. 고개 정상에 장곶돈대가 있었다. 고개를 넘으면 낙조 조망지로 유명한 장화리로 강화도 남단의 해안도로였다.
십여 년 전 이었을 것이다. 석모도 보문사를 찾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시절, 화도 선수항에서 배가 떴다. 인천 방향에서 강화도 석모도를 찾는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는 도선이 하루 두 번 석모도 매음리 선창을 오갔었다. 차츰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어지자 선창은 오래전 폐항되었다. 자연의 섭리를 인간이 어찌 알 수 있을까? 석모대교가 완공되고 보문사를 찾는 관광객들은 자동차로 섬에 들어갔다. 물흐름이 바뀌면서 삼보 12호의 기항지인 강화도 외포항에 모래가 쌓였다. 물이 많이 썰면 쌓인 모래에 막혀 선창에 배를 댈 수 없었다. 화도 선수항이 되살아났다. 바닷물은 여름에 밤물이 많이 썰고, 겨울이면 낮물이 많이 썰었다. 날이 차지면서 한 달에 25여일을 오전이나 오후 한 번은 화도 선수항에 배가 뜨고 닿았다.
화도 선수항 주차장 철책에 갈매기들이 나란히 앉았다. 녀석들은 승선객이 던져주는 새우깡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외포항 구선착장의 입구 구멍가게 평상에 새우깡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신선착장은 넓은 주차장을 자랑했지만 편의점이 너무 멀리 있었다. 승선객들은 불편을 무릅쓰고 새우깡을 사지 않았다. 이래저래 갈매기만 손해였다. 화도 선수항의 간이매점에 새우깡이 없었다. 섬주민들의 불편 해소 수단으로 군은 마이크로 버스(합승)을 대기시켰다. 차편이 없는 어르신네들을 위해 선수항 → 외포항 → 읍내 수협앞 → 강화터미널을 배시간에 맞추어 운행했다. 외지인은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서도의 섬을 찾았을 때 외포항이나 선수항에 차를 주차시켰는데 섬을 나갈 때 다른 선창에 배가 닿을 수 있었다. 개발이란 명목으로 산야를 온통 뒤집어 엎어버린 죄값을 힘없는 섬사람들이 고스란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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