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는 미술평론가 이주헌의 책 전부를 손에 넣었다. 고교시절 수업이 끝나면 밤늦게까지 미술실에서 데생을 그렸다. 고교입학 후 첫 미술시간 새로 오신 선생은 스케치북에 마티스의 〈금붕어〉를 그리게 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 나는 그림을 곧잘 그렸다. 미술부로 스카우트되어 학교 대표로 각종 회화대회에 참가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화가를 꿈꾸었다. 미술선생이 다른 학교로 떠났고, 나의 캔버스에 대한 열정도 시들해져 목탄을 손에서 놓았다. 나이가 들고 아쉬움을 미술대중서로 달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모노크롬 도판을 처음 접한 책은 20여 년 전 『산정묘지』의 시인 조정권의 예술기행산문집 『하늘에 닿는 손길』(문학동네, 1994)을 통해서였다. 시인은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예술종합지 <공간>의 편집장과 주간을 역임했다. 책은 그 시절 시인이 만났던 화가들의 짧은 미술평론집이었다. 잘 알다시피 《공간》그룹은 건축가 김수근이 이끌었다. 산문집의 한 꼭지는 화가 박서보의 모노크롬 회화를 다룬 「묘법(描法)과 탈 이미지」였다.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박서보는 흰색을 그의 회화의 유일한 톤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도구는 오직 연필뿐이다.(······) 종이 자체가 스스로 제 몸의 물성을 발언(發言)하도록 그는 끊임없이 행위를 가하는 것이다. 종이마저도 육화해가는 그의 ‘묘법’ 철학은 한 예술가를 그의 작품 속에 확고부동한 존재로서 남게 해 준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131-132쪽)
위 이미지는 제13호 태풍 ‘링링’이 9. 7. 강화도 전역을 할퀴고 지나간 다음날 아침 산책에서 만난 풍경이다. 산날맹이로 아침 해가 넘어오며 제방에 쌓인 모래의 물결무늬가 드러났다. 대빈창 해변 솔숲을 지나 제방으로 접어들자, 태풍의 흔적이 고스란히 모래에 새겨져 햇살에 말라가고 있었다. 반환점 바위벼랑이 가까워지면서 모래에 물기가 흥건했다. 나는 ‘링링’이 거대한 캔버스에 모래로 그린 그림에서 단색조 회화 - 모노크롬monochrome을 떠올렸다. 마지막은 미술평론가 유홍준의 『안목眼目』(눌와, 2017) 에서 발췌한 한국 현대미술에서 모노크롬monochrome 회화가 나타나게 되는 배경이다.
기존 미술계의 행태에 반기를 들고 진정한 예술성을 부르짖고 나선 것이 단색조와 민중미술이었다. 1970년대 서구 현대미술 추상표현주의부터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모든 미술사조가 한국 현대미술에 시차를 두고 이입되었다. 1980년대 서구 현대미술의 사정이 급변했다. 후반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한 것이다. 30대 초반의 구상계열 작가들이 다발적으로 새로운 경향을 들고 나왔다. 미국은 신표현주의로, 독일은 새야수파로, 프랑스는 자유구상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등장은 미니멀리즘으로부터 강요받았던 무미건조하고 난해한 현대미술로부터 해방된 느낌과 구상의 힘과 멋을 다시 찾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한국의 현대미술에서 그동안 미니멀리즘 계열을 좆던 추상계열 화가들은 방향타를 잃어버리는 상황에 빠졌다. 이때 한국의 아방가르드 경향의 작가들은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전환하는 대신 기존 작업을 고수하며 한국적 정신을 입히고 자기정체성을 찾았다. 단색조 회화는 우리 민족 정서에 잘 맞았다. 한국 전통미술은 백색을 유난히 좋아하고 또 여백의 미를 중시했다. 모노크롬 회화는 전통회화의 필묵이 갖고 있는 정신도 갖추었다. 서구 미술에서 모더니즘이 종말을 고할 때, 한국 현대미술의 모더니즘은 뒤늦게 보금자리를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