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마징가 계보학
지은이 : 권혁웅
펴낸곳 : 창비
21C는 문학에 있어 위기의 시대라고 스스로 문단 내부에서 진단했다. 그것은 문학이 점점 어려워져 대중이 떨어져 나가면서, 영화나 영상매체에 자리를 내주었다는 문학 내부의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권혁웅의 두번째 시집인 이 책은 그러한 현상을 비웃는 것 같다. 마치 80년대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독자의 뇌리에 펼쳐진다. 쥐오줌내 지리는 동시 상영관의 비 내리는 스크린 화면으로 옛 기억을 들추어낸다. 그것은 시인 세대의 성장코드인 '만화'와 '성'(姓)을 매개로 지난 삶의 기억을 계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분명 어린이와 젊은 시절의 한때를 달동네에서 살았다. 시에 등장하는 지명으로 보아 '삼선교' 부근의 가난한 동네다. 솜을 트는 집과 관을 짜는 집이 많았던 변두리였다. '가난에 찌든 비참하고 절망적인 삶이 빚어내는 그늘진 기억들'이 이 시집에서 계보를 이룬다. '비참한 삶의 모욕과 굴종과 폭력이 아이러니와 패러독스와 유머'로 엮어져 읽는 이들은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또한 80년대의 일그러진 풍속사를 만화와 영화를 소재로 절묘하게 추적한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을 떠 올리게 만든다. 하긴 시인과 작가는 같은 연배다. 시집에는 선데이 서울, 애마부인, 마징가, 원더우먼, 독수리 오형제, 비행접시, 괴수대백과사전, 짱가, 슈퍼맨``````이 등장한다. 전혀 낯설지 않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80년대의 후반부가 독재와 민주화운동과 시의 시절'이었다고. 그렇다. 80년 광주항쟁에서 87년 6월 항쟁과 뒤를 이은 노동자대투쟁이라는 파란만장한 격동기. 어떻게보면 우리 역사에 거대한 방점을 찍은 한 시절이었다. 시인은 80년대의 정치적 폭압과 그늘진 일상사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작품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 시절을 혈기왕성한 20대로 보낸 나도 어느 정도 할 얘기가 있다. 80년대의 상징 최루탄에 얽힌 에피소드.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87년 최루탄을 독점 판매한 데가 삼양화학으로 사장은 한영자라는 여성 기업인이었다. '88년에는 이 여성이 납세 1위였다. 기가 막힌 이 땅의 현대사이지 않은가. 왜! 그때는 365일 단 하루도 최루탄의 매캐한 가스가 서울의 하늘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최루탄도 진화한다. 신생아인 사과탄은 플라스틱 옷을 입었다. 시위대는 사과탄이 떨어지면 득달같이 달려가 농구화로 짓뭉갰다. 피시식. 놈은 힘이 없었다. 지랄탄으로 진화. 정말 놈은 지랄발광을 했다. 그것도 알루미늄으로 무장한 채. 농구화에 밟힌 놈은 더욱 신경질을 피우며 가스를 토해냈다. 두건을 쓴 20C 가투의 영웅들도 줄행랑을 놓을 수밖에. 가투를 벌이다 안산행 마지막 전철에 올랐다. 손잡이에 매달려 졸다가 고립무원의 느낌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는데 그 칸에 홀로 있는 나.
마지막은 스스로 '진보주의(?)자'를 자처하게 된 한 사건(?)을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25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 이맘때 쯤 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절 책읽기는 고사하고 술독에 빠져 있었다. 해가 중천에 가까워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만, 알코올에 찌든 뇌주름은 바싹 말라 있었고, 메스꺼운 속은 핵폐기물을 한움큼 집어먹은 것 같았다. 술이 덜 깼는 지 어쨌는 지 나의 발길은 서점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주인의 눈치도 있고, 이왕 들어온 것 책 구경이나 하자. 그때 눈에 뜨인 것이 지금은 폐간된 '녹두꽃'이었다. 제법 두께가 있는 책술의 겉표지는 허리가 동강난 한반도의 아랫도리가 장식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한 지도에 인쇄된 그림은 작고한 민중 판화가 오윤의 해방춤이었다. 그리고 뒷표지의 북한 지도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NL 진영의 이론을 대표하는 계간지였다. 며칠을 뇌세포에 균열이 가도록 들여다보았지만 생소한 개념에 진도가 더딜 수밖에.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사구체. 아니 사회과학 서적에 어쩐 일로 방광에서 오줌을 걸러내는 기관이 등장하다니. 그것은 다름아닌 '사회구성체'의 줄임말이었다. 오기가 생겼다. 사회과학 용어해설서를 구입하고, 각주에 인용된 책들을 구입했다. 하지만 파고 들수록 어려운 학문이 그 세계가 아닌가. 단 한 권의 책이 지금의 업보(?)를 만든 계기가 될 줄이야. 사족이 너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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