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슬롯
지은이 : 신경진
펴낸곳 : 문이당
2007년 제3회 세계문학상은 신인의 손을 들어 주었다. 1, 2회는 기성작가인 '미실'의 김별아와 '아내가 결혼했다'의 박현욱이 수상했다. 세계문학상은 매년 12월말까지 발표되지 않은 순수 창작품에 한한다. 그리고 당선작은 신년 2월에 단행본으로 출간한다. 장편소설 공모 문학상은 대여섯 군데서 시행하지만, 거의 신인 작품을 공모하는 것이 관례다. 세계일보사가 주관하는 세계문학상은 연륜은 짧지만, 국내 문학상 중 최대상금 1억원을 자랑하는 상업성으로 문학인과 독자들의 관심을 단숨에 끌어모았다. 하지만 기성작가의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하면서, 문학상의 효용성 논란이 인 것도 사실이다. 대중문화에서 영화 장르가 위세를 떨치자, 이제 문학은 한물간 아니 한술 더떠 문학의 사형선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던 문인들과 독자들은 때아닌 세계문학상 당선작이 빅 히트를 치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설왕설래 말들도 많았다. 고고한 문학이 천박한 상업주의에 휘둘리는 꼴을 한탄하는가 하면, 목이 타는 갈증에 내리쏟는 단비처럼 해갈을 즐기고 있는 부류도 있다. 그것이 이상징후인 지, 부활의 노래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이다. 먼저 책장을 덮은 느낌을 말하자면 최고상금을 자랑하는 문학상 수상작으로서 내게는 기대이하로 보였다.
눈길을 확 잡아끄는 도발적인 빨간 표지를 감싼 노란 띠지의 문구는 '헤어진 여자가 내게 와 속삭였다 "카지노로 가자!"' 이다. 그리고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이 이야기는 도박과 여자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삼류 통속소설의 지방지 광고 문구의 첫머리 같다. '슬롯'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컴퓨터 프로그래먼 주인공은 어느날 갑자기 걸려온 옛 애인의 전화를 받고 카지노로 향한다. 라스베가스의 화려한 샹젤리제와 귀족적인 차림의 게이머를 연상한 주인공은 이내 실망한다. 도박에 중독된 토끼눈의 이용객들이 줄담배를 피워대며 슬롯머신에 매달려있다. 카지노에서 만난 20대 초반의 예쁜 윤미는 민족사관고(소설에는 구체적인 학교명을 표기하지 않았다)를 졸업한 수재이지만, 도박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또한 예닐곱 살의 영리한 명혜의 부모도 어찌된 일인지 카지노에서 죽친다. 소설은 말미로 향하면서 (약간의 눈치가 있는 독자들은 예상할 수 있다) 기훈을 등장시킨다. 기훈은 주인공의 운동권 대학선배이면서 옛 애인 수진의 전 남편이었다.
심사위원들의 표사는 당연히 주례사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하나같이 통속적인 기대를 저버리고, 불확정성의 자본주의 메카니즘에 어쩔수없이 소외된 현대인을 그린 가독성 높은 수작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나는 잘 읽히는 가독성보다는 소설의 개연성이 문제였다. 수진은 왜 남편과 이혼하고, 뜬금없이 옛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카지노에 가 10억을 잃자고 한 것인지, 주인공은 휴가를 내면서 굳이 따라가야만 했는지, 윤미는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도박에 매달리는 것인지(물론 아버지가 도박에 중독되고, 카지노 앞 주차장에서 객사한다. 도박을 향한 보복(?)인가), 명혜 부모는 왜 카지노에서 사는 것인지(도대체 일상 생활은 어떻게 영위하고, 도바자금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나에게는 모든 소설속의 정황이 의문투성이다. 살아있는 전형적인 인물이 아닌, 흡사 만화속 캐릭터처럼 허황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물론 소설은 답한다. 그것이 도박의 중독성이라고. 또한 삶의 모호성이라고.
마지막 책장을 덮고나니, 원색의 빨간 표지와 노란 띠지의 강렬한 대비가 나에게는 먹을 것이 궁했던 어린시절, 설날이나 추석에 제사상에 오르던 오강사탕을 연상시켰다. 알록달록한 사탕의 색깔이 구미를 돋우지만 실은 설탕덩어리에 식용염료를 덧입힌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혀끝에 매달리는 조갈에 물을 급하게 들이키던 씁쓸한 기억 말이다. 그리고 기본기가 부족한 오문이 곧잘 눈에 뜨인다. 혹시 문학상 주관사는 이번만큼은 신인을 선정해야 한다는 강박(?)에 매달린 것은 아닐까. 또 한가지 의문은 겉표지 뒷장에 8명의 심사위원 표사가 실렸는데, 소설가 현기영의 표사가 없다. 내가 읽은 소설은 초판 6쇄인데, 중간에 삭제된 것인지, 원래 없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나는 그 심사평이 가장 마음에 든다. '좀 과격하게 말해서, 자본주의 적 삶이란 돈 놓고 돈 먹기의 카지노 판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궁극적으로 게임자 대부분이 잃은 자, 실패자일 수밖에 없도록 조정되어진 카지노의 생태를 치밀하게 형상화함으로써 늘 승리하는 소수 거대자본의 음모를 드러내고 있다.' 연장자의 심사평을 싣는 것이 우리 사회의 미풍양속(?)이 아니던가. 가장 존경하는 소설가의 추천평이 빠진 것이 나는 못내 아쉬웠던가? 아니면 '그 과격한 추천 평"에 도둑이 제발저린다는 의구심을 보내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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