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대빈창 2020. 1. 20. 06:25

 

 

책이름 :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지은이 : 장정일

펴낸곳 : 열림원

 

스물다섯 살 시인에게 제7회 김수영문학상을 안겨 준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은 나의 뇌리를 스치듯 지나갔다. 오히려 90년대 초에 발표한 장편소설 『너에게 나를 보낸다』, 『내께 거짓말을 해봐』그리고 소설집 『아담이 눈뜰 때』가 먼저 떠올랐다. 그 시절, 나에게 시인은 외설 작가였다. 전제주의라는 망령이 판치는 이 땅에서 황색 저널리즘이 뒤집어씌운 불명예로 시인은 신음하고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대중은 조작과 동원이 가능하다고. 나도 예외일수 없었다.

격월간 생태잡지 『녹색평론』을 100호(2008년 5-6월호)부터 정기구독하며 후원했다. 아! 시인은 책벌레였다. 서평란에 가장 많이 얼굴을 내미는 필자였다. 21세기, 시인은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두 권의 책을 손에 넣었다. 『장정일의 악서총람』(책세상, 2015), 『장정일의 공부』(NHK, 2015). 시인 박기영의 『맹산식당 옻순비빔밥』(모악, 2016).(박기영은 중퇴자 장정일을 문학의 세계로 이끌었고, 2인시집 『聖·아침』(청하, 1985)를 냈다) 이들 책을 통해 나는 시인의 불우한 성장과정을 알았다.

「삼중당 문고」(28 ~ 32쪽)는 시인의 짧은 자서전이었다. 아버지의 폭력, 여호와의 증인, 교련 문제로 고교진학 포기, 소년원 수감, 검정고시. 그동안 시인은 시작詩作을 중단하고 희곡과 소설을 펴냈다. 28년만에 신작 시집이 나왔다. 『눈 속의 구조대』(민음사, 2019). 시인의 자선시집은 동인 〈國詩〉시절 발표시와 김영승과의 2인시집 『심판처럼 두려운 사랑』(책나무, 1989), 그동안 펴낸 6개 시집에서 모두 54편을 가려 묶었다. 마지막은 김춘수의 시 「꽃」을 패러디한 표제시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54쪽)의 전문이다. 부제가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였다.

 

내가 단추를 눌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준 것처럼 / 누가 와서 나의 /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 사랑이 되고 싶다. /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 라디오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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