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여수

대빈창 2020. 4. 16. 07:00

 

 

책이름 : 여수

지은이 : 서효인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젖은 박스를 검정 고무줄로 정리하는 노인의 자박자박하는 소리가 있어 나는 휘발유처럼 조심스럽게 도로의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거기에서,

 

시집의 두 번째 시 「불광동」(11쪽)의 전문이다. 부 구분 없이 63편의 시와 시인의 고향 선배이기도 한 문학평론가 김형중의 해설 「역마의 기원」이 말미를 장식했다. 공간과 관련된 제목을 가진 시가 무려 50편이나 되었다. 시집을 여는 첫 시이면서 처가가 있는 도시 「여수」에서 곡성, 강릉, 남해, 강화, 인천, 진도, 평택, 서울, 나주, 안양, 안성과 같은 지역 명칭이거나, 이태원, 송정리역, 신촌, 연희동, 압구정 같은 도시 안의 한 구역이거나, 자유로, 올림픽고속도로, 장충체육관, 효창공원 같은 구체적인 장소가 등장했다.

문학평론가가 짚어냈듯이, 시편에 등장하는 장소는 “시간들이 병존,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고, 사적 기억에 공적 역사가 중첩되었다.” 즉 ‘역사가 공간화된 장소들’이었다. 「자유로」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와 시인의 만원버스 출근길이 겹쳐지고, 「장충체육관」은 1970년대 프로레슬링과 1980년 통일주체국민회의 체육관 대통령 선거와 이대생들이 팬티를 벗어 던졌다는 레이프 가렛 장충체육관 공연이 오버랩되었다. 「신촌」은 시인의 군대 휴가와 1987년 국민대항쟁의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대학가가, 「서귀포」는 섹스 박물관의 어린 연인과 4·3항쟁 당시 서북청년단의 민간인 학살, 그리고 「구로」는 80년대 의류공장 대우 어패럴에 다녔던 이모의 파업 투쟁과 패션 아울렛 단지로 변모한 가리봉에서 옷을 쇼핑하는 내가 겹쳤다.

뒷표지의 “문학의 이름을 빌려 자행되는 모든 위계와 차별 그리고 폭력에 반대합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눈에 밟혔다. 임솔아의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의 작가의 선언 “젠더, 나이, 신체, 지위, 국적, 인종을 이유로 한 모든 차별과 폭력에 반대합니다.”가 떠올랐다. 페미니즘 논쟁과 성폭력 폭로 이후, 문인들은 작품 속의 여성혐오 표현을 수정하는 것이 문단 내 새로운 풍경이 되었다. 시인은 스스로 ‘자기검열’을 작동시켰다. 뒷표지를 덮자,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가트에 시인의 첫시집과 두 번째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민음사, 2010)과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민음사, 2011)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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