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56억 7천만 년의 고독

대빈창 2020. 4. 29. 07:00

 

 

책이름 : 56억 7천만 년의 고독

지은이 : 함성호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함. 성. 호. 시인의 이름 석자가 나의 뇌리에 스며든 시간은 오래 되었다. 시인 친구 함민복의 두 번째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의 해설 「공포의 서정, 환위(換位)의 시학」을 통해서였다. 20여 년이 지난 세월의 풍화작용은 단지 시인과 해설을 쓴 이가 희귀한 동성(同性)에 동년배였다는 화석화된 기억뿐이었다. 마음에 두었던 책은 언제인가 무슨 인연으로든 손에 잡히게 마련이었다. 시집은 그때부터 나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았는지 모르겠다.

함성호는 시인이면서 건축가·건축평론가였다. 나의 잡식성 독서 편력은 건축학에도 이미 발을 들였다. 책장에 십여권 이상의 건축대중서가 자리 잡았다. 마음으로 꼽는 건축가·건축평론가는 승효상, 김봉렬, 정기용, 임석재 정도였다. 시인의 건축학 에세이들을 얼마나 가트에 넣었다 거두기를 반복했던가.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이제 시인의 첫 시집을 손에 펼쳤다.

표제 『56억 7천만 년의 고독』에서 우선 미륵불이 생각났다.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불(미륵)은 도솔천(兜率天)에 머물면서 중생을 교화하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고 56억 7천만 년 후에 이 세상의 용화수(龍華樹) 아래로 하생(下生)한다고 한다. 이에 따라 사찰에서 미륵불을 모신 법당을 용화전(龍華殿), 미륵전(彌勒殿)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 한때 배낭을 메고 이 땅을 떠돌았던 나는 보은 속리산 법주사와 김제 모악산 금산사의 미륵전을 떠올렸다. 그리고 화순 운주사의 천불 천탑와 와불을. 시집의 自序는 이랬다. “천불 천탑 세우기 내 詩쓰기는 그런 것이다.”

시집은 부 구분 없이 62 시편이 실렸고, 해설은 문학평론가 김진수의 「비와 바람 속에서 - 함성호의 시」였다. 시인은 건축가답게 말했다. “내 시의 패트론은 나의 건축이고 내 건축의 패트론은 나의 시다.” 그리고 부제가 ‘건축사회학’인 연작시가 14편이 실렸다. 헌사에 실린 ‘저 황도를 홀로 가는 태양의 지루한 여행을 위해’ 는 「타르쵸」(30 - 34쪽)의 한 연이었다. 시인은 다방면에 재능을 나타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상징은 표지 그림의 시인 컷이다. 대부분 화가·소설가 이제하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시집의 컷은 자화상이었다. 마지막은 표제시 「56억 7천만 년의 고독」(54 - 55쪽)의 부분이다.

 

21세기는 우리를, 마약과 동성애와 근친상간과 싸운 / 바보스러운 세대로 기록할 것이다 / 聖과 俗과 천국과 지옥의 잠속에서 / 나는 그대를 추모하지 않는다 / 당신의 꽃과 비의 정원에서 / 무엇인가에 불리어가는 듯한 썰물의 흉한 가슴 /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 모든 죽음들에게, 입에서 항문까지 / 비로소 내장된 세상이 환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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