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주인공
지은이 : 박상순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누군가 내 짐들을 자꾸 / 공원 잔디밭에 옮겨놓아요 // 내가 잠든 사이에 / 나마저 그곳에다 옮겨놓아요
시집을 여는 첫 시 「붉은 체크무늬의 외투를 뒤집어 쓴 태양」(11쪽)의 전문이다. 회화성이 두드러진 시였다. 그렇다. 시인은 서울대 회화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화가였다. 시집은 1부 35편, 2부 14편으로 모두 49편이 실렸다. 1996년 《세계사》에서 발간된 시인의 두 번째 시집으로 박상순 시집의 특징으로 굳어진 해설을 싣지 않은 파격을 보여 준 시집이었다. 1부의 시들은 첫 출간 때의 형태를 흩트리지 않은 선에서 시인이 첨삭을 가했다고 한다. 2부는 미출간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큰 형이 대문을 나섰다. 나는 슬그머니 형의 독방인 건너 방으로 잠입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보풀이 일고 붉은 기가 바랜 커튼을 젖혔다. 삼단 책장의 앞트임을 낡은 커튼으로 압정을 박아 가렸다. 스무여 권의 책이 보물처럼 숨겨 있었다. 일명 붉은 책들이었다. 큰형과 여덟 살 터울로 나는 막 중학생이 되었다. 창틀에 문고판 책을 펼쳐놓고, 대문의 인기척을 흘끔거렸다. 나의 도둑 책읽기는 사춘기의 달뜬 열기를 뿜어내는 날숨에 아찔함과 비릿함이 묻어있었다.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주인공』(2017) 표제에서 아련한 그 시절을 떠올렸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R』은 독자들이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절판 시집들을 복간하는 시리즈다. 현재 ‘R16’으로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최승호, 2018)까지 나왔다. 시선에서 전 권을 손에 넣은 유일한 시집 시리즈였다. 사실 출간이 자꾸 뒤로 밀리던 이 시집으로 말미암아 시선 전부를 소장하게 되었는지 몰랐다. 성질 급한 나는 복간본을 기다리다 시인의 첫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민음사, 1993)를 먼저 잡았다. 마지막은 말미에 실린 시인의 시론(詩論)이라 할 수 있는 산문 「그림 카드와 종이 놀이」의 마지막 문장이다. “시는 그것을 말함으로써 비로소 그것이 말해지는 언어이다. ‘나’를 무너뜨리면서도, 어떤 희망도 미래도 없는 ‘나’를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는 생존이다.”(109쪽)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0) | 2020.05.18 |
---|---|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0) | 2020.05.15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 순례 (0) | 2020.05.07 |
56억 7천만 년의 고독 (0) | 2020.04.29 |
나의 서양미술 순례 (0) | 2020.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