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혼자서 본 영화
지은이 : 정희진
펴낸곳 : 교양인
이 땅에서 접두사 ‘만성’이나 접미사 ‘증후군’이 붙은 질환은 난치병·불치병을 뜻했다. 지난해 10월초 별스럽지 않게 여기던 몸의 증상이 지금까지 신경에 거슬리고 행동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죽을병은 아니지만, 삶을 마칠 때까지 몸에 달고 살아야할 불편을 떠올리면 온 몸의 신경이 송곳처럼 날카로워졌다. 한국의 의학으로 완치를 꿈꿀 수 없는 질환이었다. 죽을 때까지 재발을 반복하며 신경을 갉아먹는 병증에 소름이 끼쳤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두드리면 열린다던가. 중국 연변 조선족 박사의 치료에 희망을 걸 수 있었다.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이 필요했다.
중국행 비자를 발급받고, 2. 19. 항공권을 예약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3개월의 연변 체류 준비를 마쳤다. 짧지 않은 치료기간을 앞에 두고 마음을 다졌다. 치료를 마친 이들의 권고가 힘이 되었다. 오전은 통원 치료를 받지만, 오후·저녁시간은 온전히 남아돌았다. 타국에서 3개월동안 반나절의 시간을 슬기롭게 이겨내야 했다. 그동안 나의 삶은 영화와 거리가 멀었다. 태블릿pc를 구입했다. 케이블 연결선을 샀다. 넷플릭스를 깔았다. 그렇다. 지금 욕심 같아서는 매일 한편씩 혼자서 영화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태블릿pc와 케이블로 연결된 오피스텔 대형TV는 영화관 스크린 효과를 어느정도 보장할 것이다. 코로나-19가 발목을 잡았다. 나의 연변행은 한두 달 뒤로 물러났다. 그때 이 책이 떠올랐다. 여성주의·평화 연구자 정희진의 『혼자서 본 영화』(교양인, 2018)가 책장에서 몸이 아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족의 탄생 / 하얀 궁전 / 인 더 컷 / 피아니스트 / 디 아워스 / 맘마 미아! / 샤도우랜드 / 외출 / 문라이트 / 릴리 슈슈의 모든 것 / 타인의 삶 / 밀양 / 끔찍하게 정상적인 /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 위플래쉬 / 질투는 나의 힘 / 더 스토닝 / 거북이도 난다 / 슬픔의 노래 / 송환 / 강철비·의형제·용의자·공조 / YMCA 야구단 / 박치기!·우리 학교·피와 뼈 / 그때 그 사람들 / 사방지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 웰컴 투 동막골 / 머니볼
책은 28개의 장으로 구성되었고, 33개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책은 영화중독자이기도 한 저자가 20년 동안 쌓아 둔 영화에 대한 내밀한 기록이었다. 저자에게 영화를 보는 것은 “내 경험 너머 새로운 앎의 세계”를 만나는 일이었다.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화에서 저자는 특히 세편의 영화에 ‘내 인생의 영화’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플로리안 헹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타인의 삶〉(2006, 독일), 나카시마 테츠야의〈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 일본), 데이미언 셔젤의 〈위플래쉬〉(2014, 미국) 이었다. 저자는 〈타인의 삶〉을 혼자 관람하면서 영화가 자신에게 더 타락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희진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본 영화는 우리의 인생과 붙어있다. 몸으로 영화를 본다. 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연출’의 의도가 아니라, 관객의 세계관에 달려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이다.”(97쪽)
나의 독서 여정이 30년을 넘어섰다. 몸이 아프거나, 신경이 곤두서면 잡기 편한 책을 빼들었다. 그런데 의도치 않은 책이 벽력처럼 깨달음을 안겨 줄때가 있었다. 이 책이 그러했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양서(良書)라고 해야 옳았다. 책을 잡을 때마다 저자의 권력과 젠더에 관한 놀라운 감수성에 감동받았다. 이 책은 여성을 바라보는 또다른 시각을 일깨워주었다. 이 땅의 페미니즘 담론의 최전선에 선 여성학자 정희진의 책을 펴내는 출판사 《교양인》이 고마웠다. 저자의 따끈따끈한 책이 나왔다. 여지없이 출판사는 《교양인》이었다. 나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두 권의 책을 손에 넣었다.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와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죽음학 강의 (0) | 2020.04.06 |
---|---|
오늘은 잘 모르겠어 (0) | 2020.04.02 |
박남준 시선집 (0) | 2020.03.27 |
노회찬의 진심 (0) | 2020.03.25 |
서울에서 다시 사랑을 (0) | 2020.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