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이미지는 스무날 전 오후 2시30분경에 잡은 이미지입니다. 삼보6호 2항차로 볼음도에 닿았습니다. 화백의 작업실 주변은 여느 때나 다름없이 고적했습니다. 출입문 손잡이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클래식이 흘러나왔습니다. 현관 칸막이에 막혀 실내의 동향을 알 수 없었습니다. 화백은 오늘도 산책을 나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이며 칸막이를 돌아섰습니다. 캔버스를 두 손으로 들고 벽으로 다가서는 화백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나는 소리 없이 한 컷 이미지를 담았습니다. 칸막이를 손바닥으로 두서너 번 가볍게 내리치자 예의 악동 웃음을 지으며 화백이 뒤돌아섰습니다.
불을 밝힌 풍로가 놓인 소파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화백은 머그컵에 약초달인 물을 가득 부어 내 앞에 내놓았습니다. 나는 연초 뉴욕의 전시회 소식부터 물었습니다. 화백은 1월말에 귀국했습니다.
“운이 좋았지.”
그렇습니다. 전시회의 성공여부를 떠나 화백은 탈 없이 고국에 돌아온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조금만 지체했으면 뉴욕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발이 묶였을 것입니다. 지금 뉴욕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아비규환의 살풍경한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4월 들어 그림이 손에 붙네.”
벽에 기대어 줄지은 4점의 그림은 ‘벽’ 시리즈였습니다. 내가 처음 본 화백의 그림은 ‘4월’ 연작 시리즈입니다. 캔버스는 천장까지 닿을 듯했습니다. 화백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붓질을 했습니다. 작은 호수의 그림이 낯설게 보였습니다. 화백은 요즘 붓이 손에 붙는다고 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작년 그림들까지 새로 손을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2016 - 2017년 광화문 촛불집회 동지였습니다. 주말 주문도에서 2시배에 올랐습니다. 볼음도에서 화백이 승선했습니다. 이심전심이었습니다. 광화문 촛불집회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밤이 깊어 화백은 지하철 출입구에 자리잡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 시절 화백은 민미협(民美協) 회장을 역임하고 있었습니다. 묻지 않았지만 화백은 80년대 민중미술 화가로 독재정권의 탄압을 맨몸으로 이겨냈을 것입니다. 추위를 녹일 겸 막걸리 한 잔하자는 화백을 뒤로 하고 김포 행을 서둘렀습니다. 술 한 잔 나누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습니다. 이 땅의 마지막 민중미술 화가로 불리는 박진화 화백. 군홧발 정권이 쇠몽둥이를 휘두르던 그 시절. 거리의 젊은 화가의 모습이 궁금했습니다. 마지막은 강화발, 〈분단의 몸-박진화〉展의 인터뷰에서 발췌했습니다.
"제가 경험을 직접 하지는 못했지만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입니다. 1980년에 저는 대학 4학년이었어요. 그때의 광주항쟁은 제게 심리적으로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제게 큰 사건은 1987년 6월 항쟁이었어요. 내 속에 큰 뭐가 팍 밀려들어온 느낌이 있었던 게 87년 6월 민주항쟁이었으니까요. 그 사이에 이건 미술적 사건인데 1985년 7월에 있었던 '20대 힘전' 사태인데, 이 '힘전'사태는 저(박진화)하고 손기환, 박불똥 셋이 기획한 전시가 공권력에 의해 강제 철거되고 일부 참여 작가가 구속된 사건을 말합니다. 1985년 전두환 정권 시절 이러한 일련의 예술탄압사건이 벌어지면서 제 자신도 잠시 구속되었던 경험이 있었는데, 그러한 것들이 어우러져 저는 심한 충격과 아픔을 경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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