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경자년 대설을 하루 지나 하곡霞谷 선생 묘를 찾았다. 진강산 서록을 넘는 하우고개 정상 공터의 〈정제두선생숭모비〉의 오석烏石이 빛바랜 겨울 해를 되쏘았다. 선생의 묘는 길가에 바투 자리 잡았다. 새로 조성된 주차장이 꽤나 넓어 보였다. 길 건너 묘소를 바라보면 봉분 두 개가 이어졌다. 길가까지 내려 온 산자락의 봉분을 잔솔과 떡갈나무, 밤나무가 에둘렀다. 빛바랜 낙엽이 메마른 잔듸위에 뒹굴었다. 앞의 봉분은 하곡 선생의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한산이씨韓山李氏의 묘였다. 묘비와 상석 그리고 홀을 든 문인석이 마주 보고 서있다. 긴 장대석으로 석축을 쌓아 구분한 선생의 묘 앞에 상석, 향로석, 망주석 2기와 2m 크기의 홀을 든 문인석이 좌우에서 시립했다. 실천적 지식인의 무덤가에 피어난 억새꽃이 계절을 재촉하고 있었다.
우리 시대의 사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쇠귀 신영복(申榮福, 1941 - 2016)은 강화도 하일리霞逸里 하곡 정제두(鄭濟斗, 1649 ~ 1736)의 묘를 찾으며 『나무야 나무야』(돌베개, 1996)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녁노을은 하루의 끝을 알립니다. 그러나 하일리의 저녁노을에서는 하루의 끝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곳 하일리에서는 오늘 저녁의 일몰에서 내일 아침의 일출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48쪽) 나는 선생의 글을 읽고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진보성을 새롭게 인식했다.
하곡은 조선 현종9년(1668)에 문과 초시에 급제하여 영조 때 사헌부 대사헌, 이조참판 요직에 임명되었다. 그는 20세부터 박세채를 스승으로 모시고 양명학을 공부했다. 조선은 유교적 정통주의에 입각하여 양명학을 이단시했다. 양명학陽明學은 명의 왕양명에 의해 주창되었고, 정제두는 조선의 양명학을 확립했다. 지식인의 실천을 강조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한 학문이었다. 하곡은 주자학의 학문적 진실성을 비판했다. “오늘날 주자의 학문을 말하는 자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자를 핑계 대는 것이요, 나아가 주자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 그 뜻을 성취시키며, 주자를 끼고 위엄을 지어서 사사로운 계책을 이루려는 것이다”라고.
하곡은 당쟁으로 하루해가 뜨고 지는 서울을 표연히 떠나, 진강산 남쪽 기슭 하일리에 자리 잡았다. 정제두에 의해 양명학은 강화에서 학문의 일가를 이루었고, 강화학파는 200여 년간 지속되었다. 학파의 계보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완성자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 큰 저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남긴 이긍익(李肯翊, 1736-1806), 조선 과거사상 최연소(15세)로 급제한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1852-1898)으로 이어졌다. 강화학파는 학문에서 동기의 순수와 실천의 지극을 강조했다. 구한말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강화학의 후예들은 민족의 비극 앞에서 장엄한 최후를 선택했다.
강화학파의 태두泰斗 하곡 선생 묘소를 나오면서 나는 학파의 마지막 제자 영재의 사생관死生觀을 떠올렸다. 모든 벼슬을 거부하는 철두철미한 보수주의자 이건창에게 고종은 최후통첩을 내렸다. “벼슬이냐, 아니면 유배냐” 영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유배를 택했다. 그것도 가장 혹독하다는 절해고도 고군산열도로 향했다. 조선 양명학의 정신이었다. 영재는 신분질서를 혁파하고 부정부패의 발본을 주장했다. 이 시대의 보수주의자를 바라보는 강화학파의 통탄이 들려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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