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이지누의 집 이야기
지은이 : 이지누
펴낸곳 : 삼인
사진가·기록문학가 이지누를 뒤늦게 만났다. 군립도서관에 희망도서를 신청하고, 네 권을 대여했다. 아쉬움이 컸다. 마지막 책이었다. 작가의 신간이 나오기를 기다려야겠다. 책은 민속학을 바탕으로 인문적인 시각으로 바라 본 집 이야기였다. 집을 구성하는 각기 다른 공간에 대한 이야기로 유년 시절의 회고담이며 민속학의 보고서였다. 작가는 ‘지금같이 사람이 손님처럼 드나드는 집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이었던 시절의 집’(12쪽) 이야기를 풀어냈다. 한국화 화가 류충렬의 23점의 담백한 톤으로 그려진 삽화가 글 읽는 맛을 더했다. 글은 프롤로그 「사람의 집에서 사람을 찾다」에 이어 집의 안팎을 구성하는,
골목 / 대문 / 울타리 / 변소 / 마당 / 지붕 / 우물 / 부엌 / 마루 / 창문 / 구들 / 방
의 12개 챕터로 구성되었다. 첫 꼭지 「골목」에, 조선 후기문신 영재寧齋 이건창(1852 - 1898)의 수당修堂 이남규(1855 - 1907)에게 지어 준 기문 「수당기修堂記」에 골목 정경을 그린 아름다운 글이 실려 있다.
‘미나리 골이라고 하는 골목이 서울의 회현방會賢坊과 장흥방 長興坊 사이에 끼여 있는데, 그 골목길이 마치 소라껍데기인 양 개미길인 양 빙긍빙글 회 돌고 꺾어진 것이 좁고 누추하여 거마車馬가 다닐 수 없다’(30쪽)
마지막 꼭지 「방」에, 조선 중기문신 아계鵝溪 이산해(1539 - 1609)의 『걸귀록乞歸錄』에 실린 「띳집茅室」이라는 시가 실렸다.
숲 사이 띳집이 달팽이처럼 작은데 / 쇠죽 끓이는 아궁이에 조밥 지으니 방 더욱 따듯해라 / 기왓장 베개에 찢어진 이불이지만 잠이 넉넉하여 / 밤새 비바람이 많았음에도 알지 못한다네.(242쪽)
나는 김포 한들고개의 초가집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다. 고개 정상의 초가집은 김포 들녘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낮은 둔덕에 띄엄띄엄 집들이 자리 잡아 골목이 없었다. 아랫집은 우리집에서 20여m 언덕아래 앉았다. 중학시절 목수였던 육촌아저씨가 양옥으로 새집을 지으셨다. 김포에서 강화로 향하는 48번 국도에서 바라보는 언덕 위 우리집은 그럴듯했다. 널을 켠 판자로 짠 대문은 송진 냄새를 풍겼다. ‘오래뜰’은 대문 밖을 가리켰다. 울타리는 조립식 담이었다. 날이 풀려 해토가 될 무렵이면 조금씩 기울더니, 해가 더하면서 주저앉았다.
변소는 푸세식이었다. 아버지는 밑딱이용으로 일력을 얻으러 읍내 철물점에 발걸음을 하셨다. 변소 입구 참나무가 그늘을 드리웠다. 한겨울 맹추위에 똥무더기가 탑을 쌓았다. 엉덩이를 찔릴 것 같은 조바심에 애태웠다. 주문도에 삶터를 꾸리면서 변소는 좌변기로 바뀌었다. 자칭 활자중독자인 나는 일을 보려면 손에 책을 들려야 마음이 놓였다. 한들고개집은 뒤란이 장독대였다. 아름드리 참나무와 세월 묵은 뽕나무가 뒷집과 경계 지었다.
마당은 황토였다. 겨울이면 언덕집은 햇살이 따뜻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이엉을 엮어 초가지붕을 새로 얹었다. 나는 친구들과 그 마당에서 딱지치기와 구슬놀이를 했다. 가을이면 마당에 볏단 낟가리를 쌓고 탈곡패를 불렀다. 마을 공동우물을 사용했다. 학교를 파하면 부엌의 물독에 물을 채우는 일이 나의 일과였다. 노거수 향나무 세 그루가 우물 지붕 역할을 했다. 향나무 뿌리가 우물까지 뻗어 물맛이 좋다고 했다. 함석통 물지게를 지는 일은 고역이었다. 언덕을 서너 번 오르내리면 입에서 단내가 났다. 여름이면 우물에 김치를 담은 오렌지색 둥근통을 긴줄에 묶어 내렸다. 요즘 냉장고였다.
부엌의 바람벽은 멍석이 대신했다. 황토가 날아들어 하얀 사발이 벌겋게 물들었다. 어머니의 군일이었다. 가난한 살림이지만 어머니는 연탄공장 노동자 외삼촌께 TV를 사오게 했다. 아이들이 프로레슬링을 보려 들녘에서 어둡도록 페인트 깡통 가득 개구리와 물고기를 잡아 상납하는 꼴을 볼 수 없었다. 네 발 다리로 선 미닫이 문이 달린 어른 둘이 들어야하는 덩치 큰 TV는 가난하지만 애들 기를 죽이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통 큰 마음이었다. 주문도에 집을 구하면서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나의 방 창문에 이끌렸다. 책을 읽다 눈을 들면 석모도 보문사가 바다건너 보였다.